[스페셜][의료인의 술모임] 맛있는 술이 건강한 술

누루커스
2024-02-08
조회수 318

ⓒ김시곤


  세상에는 값비싸고 진귀한 술들이 많다. 술을 잘 모르는 나도 고가의 유명하다는 술은 어떤 맛일까 항상 궁금하긴 하다.

  오늘은 의과대학 동기들 모임이 있는 날이다. 내가 평소에 접하지 못했던 술을 친구들이 가져오니 항상 기대가 된다. 대학을 다닐 때나 레지던트 시절에는 스트레스가 풀릴 거란 막연한 치기로 술 맛도 모른 채 취하려고 술을 마셨던 거 같다.


 


  이제 모두들 중년이 되니 각자 취향대로 좋아하는 술이 생겼다. 모임을 주도한 친구가 면세점에서 30년산 위스키를 샀다며 기대하라며 바람을 넣는다. 와인 매니아 친구는 와인 비교체험 극과 극을 준비했다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나는 야심 차게 비어텐더를 준비했다.


  첫 잔은 위스키로 시작한다. 순서가 조금 이상하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친구가 가방에서 30년산 위스키를 조심히 꺼내어 온더락으로 잔에 따라주는데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향부터 맡으라는 데 과일 향 같기도 하고 나무 탄 냄새 같기도 하고 도통 모르겠다. 한 모금 들이켜니, 알코올 원액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위스키는 모르겠다. 배 안 부르게 취하기에는 좋을 거 같은데 내 기준엔 그냥 비싼 술이다. 

  이어서 프랑스 고급 와인과 편의점 와인의 비교 시음 순서가 왔다. 번갈아 마셔보면 좋은 와인은 확실히 다르다며 친구가 열변을 토하며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설명한다. 들리지 않는다. 근데 왜 난 만원짜리 와인이 더 달달하고 맛있지?


  결국, 늘 그렇듯 난 시원한 맥주를 찾게 된다. 오랜만에 생맥주를 마셔보니 캔맥주보다 더 맛있다는 건 확실히 알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기네스 드래프트를 살살 흔들어 잔에 따르니 짙고 고소한 풍미, 눈동자처럼 깊은 흑갈색 빛깔, 의료솜처럼 부드러운 거품의 조화는 그 어떤 비싼 술보다 최고인 거 같다.

  친구들이 기네스 캔 안에 들어있는 플라스틱공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물어본다. 기네스에 꼭 따라 붙는 의문점이다. 흔들어주면 거품 생기는 용도인 거 같아, 캔을 따고 살살 흔들어 주길 십 년인데, 이게 맞는 건가 싶다 가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간 게 또 십 년이다. 사실, 내가 캔 뜯고 공 갈라봐서 아는데, 아무것도 안 들어있었다고 썰을 풀었더니 다들 눈빛이 차갑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나 보다. 애주가들이 보기엔 경솔한 행동이었던 것 같긴 하다.

  플라스틱공 안에 질소가 들어있고, 캔을 여는 순간 탄산과 섞여 나오며 크리미한 거품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런 심오한 원리가 숨어있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게으름과 무식함에 부끄러워진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즐길 수 있다는데, 술도 그 원리와 배경을 알고 즐기지 못하면 술꾼이 될 뿐이구나. 침 튀기며 와인은 어떻고 위스키가 뭐가 좋고 설명하는 친구들이 조금은 존경스러워졌다.


ⓒ김시곤


  취기가 조금 돌고 자연스레 중년 남자들의 대화의 화제는 건강으로 흘러간다. 난 비어텐더 기계가 눈에 보일 때마다 생맥주 유혹을 못 참고 먹었더니 배가 나왔다고 하소연을 시작한다. 그건 맥주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밥은 그대로 먹으면서 술도 먹었기 때문이라며 내과의 날카로운 의학적 소견이 들어온다. 술 자체의 칼로리는 알코올 분해에도 쓰이기 때문에, 하루 총 칼로리는 유지하고 일부를 술로 섭취하면 오히려 살이 빠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한다. 이어서 프랑스 와인 매니아인 외과가 심혈관에 좋은 하루 와인 한 잔에 대해 썰을 풀기 시작한다. 그만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와인 코르크 마개를 따버리면 어쩔 수 없이 여러 잔을 마실 수밖에 없다고 실토한다. 위스키를 가져온 내과 놈은 술 한 잔도 간에는 안 좋다며 한 잔만 선택한다면 위스키 온더락이 최고라고 주장한다.


  간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지고 갑자기 술 맛이 없어진다.

  술 한 잔도 간에는 독이라, 평생 마신 술의 양만큼 간을 죽이고 있다는 슬픈 진리가 떠오른다. 그래도 친구 중에 부어라 마셔라 하는 술고래는 없고, 다들 절주할 줄 아는 건강한 음주습관을 가져 다행이다. 몸에 좋은 술은 없지만, 좋은 자리에서 즐겁게 즐기는 술을 포기하면 정신건강에 안 좋다고 의견이 하나로 모인다. 한 잔을 마셔도 맛없는 술은 마시지 않겠다고 다들 다짐해 본다.

  모두들 각자 좋아하는 술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즐기길 바래 본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 공부를 열심히 해서 그럴싸한 이야기를 다음 모임에는 해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nurukers



--

김시곤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지만 현재는 경기도 고양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며 호시탐탐 술자리를 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