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하게 밀려오는 외할머니의 시골집 풍경이 귀한 것이었다고 여기게 된 것은 먼 타국 땅에서였다. 중소도시의 아파트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여름과 겨울 방학을 외할머니가 계시는 먼 시골로 가서 보냈다. 대가족이었던 할머니 집에서 보낸 설날이나 추석같은 명절, 가족 잔치나 장례, 꽃 상여를 따라 걷던 모습이 마치 다른 세상의 기억처럼 아련히 떠오를 때가 있다. 어쩌면 그 어느 집이더라도 낯설지 않았을 일들이 ‘집의 형태’가 바뀌면서 박물관이나 박제된 민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도 먼 타국에서 우리를 한발 떨어져 보았을 때야 알게 되었다.
마당이 사라진 집은 몸으로 기억 해 왔던 감각과 냄새와 소리를 바꾸어 놓았다. 그때 우리는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인지, 무엇을 바꾸어 놓을지 미처 알지 못했다. 구태한 것을 버리고 더 나은 신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세상을 뒤덮은 플라스틱과 영혼 없이 차려지는 상차림을 만날 때마다 그 예전엔 미처 알 수 없었던 오늘과 맞바꾼 텁텁한 흙 냄새가 그립다고 생각했다. 길가의 미루나무 대신 전신주와 아파트가 놓여진 풍경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미래를 위해 기꺼이 버렸던 그 세계가 가끔은, 몹시, 그리운 것이다.
하얀 눈처럼 포근했던 집의 추억 ⓒ이서재 ⓐ누루커스
할머니 집은 너른 논을 한참 지나고서야 닿았다. 그 길은 계절마다 다른 색과 모습을 지녔다. 높낮이 없이 편편한 도화지 같은 땅에 계절의 색이 입혀졌다. 익어가는 것의 의미를 그때 알았다. 그 너른 논에서 얻은 쌀을 온 가족이 먹었다. 긴 논이 끝날 즈음에 거대한 미루나무가 늘어 서 있는 좁은 흙 길을 지났다. 그 길을 지날 때는 뽀얀 흙 먼지가 일었다. 바람이 불면 커다란 잎이 뒤집어져서 연한 쑥색과 같은 잎사귀의 뒷면이 손바닥 뒤집어 인사하듯 팔랑이던 나무였다. 그 미루나무만 있으면 할머니 집을 혼자서도 찾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 집에 도착하면 사랑채의 서까래에 매단 그네를 타며 툇마루 위에서 놀던 사촌 동생들이 해에 잘 그을려 까만 얼굴을 하고 뛰어 왔다. 드문드문 만난 탓에 만날 때 마다 처음엔 어색했고 논두렁 사이를 뛰어 놀며 금세 친해 졌다. 하얀 한복을 입은 증조 할머니와 머리에 갓을 쓰고 곰방대를 문 증조할아버지가 계셨던 ㅁ자 한옥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마당은 거대한 운동장 같았다. 나이가 한 살씩 먹을 수록 그 마당이 점점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여름에 할머니 집에 가면 삼촌이 운전하는 경운기에 포장천으로 지붕을 만들어 타고 강가나 냇가에서 놀았다. 아이들끼리는 논물이 허리까지 찬 개울에서 헤엄치며 물방개, 개구리를 잡았다. 거머리가 무서우면서도 이 다른 세계의 놀이가 신기하고 즐거웠다. 밤이 되면 동네 친구들과 쥐불놀이를 하거나 숨바꼭질을 했다. 가로등 없이 달빛 만으로도 대낮처럼 밝았다. 밤이지만 한 낮의 운동장처럼 집과 집 사이를 뛰어 놀았다. 여름의 뒷 마당에는 처마 아래에 청포도 나무가 있었다. 집 주변을 뛰어 놀다가 포도나무 아래에 가서는 꼭 청포도를 한 알씩 따 먹었다. 여름은 길고 방학은 짧았다.
겨울 집의 방은 이글이글 끓었다. 부엌에는 큰 가마솥이 두 개 있었고 솥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아궁이에 나무를 넣어 보고 싶어서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불 앞에 서성이고 있으면 어른들은 불장난하면 오줌 싼다고 다그치며 밖으로 내 보냈다. 장날이 되면 숙모와 어린 나는 눈이 와서 종아리 까지 푹푹 빠지던 산길을 걸어 장을 보러 갔다. 나는 달걀이 먹고 싶다고 했고 갓 난 달걀 두 개를 신문지에 싸서 들고 다시 산을 넘어 왔다. 그 길의 겨울 나무는 가지가지마다 눈꽃이 마냥 세상을 신기해 하는 눈동자처럼 반짝였다. 벼베기가 끝이 난 논이 꽁꽁 얼면 썰매를 탔다. 삼촌은 툭툭 나무를 잘라다가 썰매를 잘도 만들었다. 비료 포대도 훌륭한 썰매가 되었다. 눈이 가득 내리면 비료포대를 깔고 좁은 산길을 한 사람씩 미끄러져 내려왔다. 볼은 빨갛게 달아 오르고, 세상은 온통 하얗고, 집집마다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 올랐다. 각 방은 온돌이어서 아랫목이 있었고, 부엌에서 음식을 하며 불을 지피면 방이 뜨거워 졌다. 구들에서 가까운 아랫목은 종이 장판이 고구마 익어가듯 까맣게 타 있었고, 그 바닥에 누우면 너무 뜨거워서 앞 뒤로 번갈아 돌려가며 누웠다. 설날이 되면 할머니가 해주시는 찹쌀떡이 기다려졌다. 절구에 뜨거운 찹쌀을 방망이로 치대어 쫀득해진 떡살에 팥 소를 넣고 넓적한 떡을 만들어 놓으면 누가 먹었는지 금세 사라졌다. 할머니 몰래 몇 개를 가져다가 이불 속에서 동생들과 나누어 먹었다. 겨울은 차갑고 하얗고 뜨겁게 지나갔다.
ⓒ이서재 ⓐ누루커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 한옥집은 서울 사람에게 팔려 세 등분 되었다. 나무 문을 떼어내고 흰색 샷시 문이 달렸다. 마당과 돼지나 소를 키우던 우리, 우물과 대문도 사라졌다. 큰 외삼촌은 그 집과 논 사이에 양옥집을 새로 지었다. 사계절의 색이 잔물결처럼 일던 논에는 비닐하우스가 들어 섰다. 천연의 색이 융단 같던 논은 플라스틱으로 덮혀져 한치 앞을 가렸다. 마을을 혼자서도 찾아 올 수 있을 것 같았던 흙 길의 미루나무는 잘려나가 멀끔한 길이 되었고 나무 대신 전신주가 늘어섰다. 마을과 마을이 논으로 이어져 평화롭던 이웃의 땅은 거대한 공장들이 세워졌다. 그 어디를 둘러봐도 시로 가득했던 마을이 군인으로 가득 찬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할머니 집에는 가지 못했다.
마당이 사라진 집의 풍경은 달라졌다. 생활이 지혜가 되어 이어가던 집은 주거와 부동산으로 여겨졌으니 그 지혜는 이어오지 못하고 집과 함께 사라졌다. 생의 가장 근본인 의식주가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한 지혜로 살아남아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문화를 이룬다. 그 문화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집이야 말로 거대한 서사를 가진 우주가 아니고서야 무엇일까. 삶을 이루는 집의 양식이 달라지는 일은 단순히 거주의 방식이 바뀌는 것 뿐만 아니라 삶을 기반해 쌓여 온 생활 양식과 문화가 함께 사라지는 일이었다. 대대로 이어 오던 일들이 단절 되고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 바뀐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와 ‘시간의 개념’과 ‘삶의 가치관’까지도 바뀌는 일이다. 현대적인 삶이란 무엇에 기준하는 것인가, 그 현대적인 삶으로 가는 시스템으로부터 누가 어떤 이익을 얻는 것인가, 편리한 오늘의 생활은 우리에게 어떤 기억을 감각으로 남기는가, 우리는 그러한 삶을 영위하면서 이전 보다 나은 질의 삶을 살고 있다고 과연 말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오늘의 생활이 더불어 모두를 이롭게 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일구게 하는가. 우리가 단 한번도 멈추어 묻지 않고 이 땅을 갈아 엎으며 달려 온 오늘은 사라진 마당과 집 만큼이나 잃어야 하는 것이 많다. 그것은 수 백, 수 천년을 땅에 기대어 이어 온 지혜의 유산을 초고속 엘리베이터의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내다 버린 것과 다르지 않다.
집_술 ⓒ이서재 ⓐ누루커스
2015년, 13년만에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집>을 내 자신의 작품과 태도의 중심에 두고자 마음을 먹었다. 자연스레 집의 문화와 더불어 우리 술 문화를 찾아 공부하고 술 빚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술 빚기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의 와인처럼 긴 역사 속에 깃든 우리 술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 술 빚기를 배우며 한국에서 술이 갖는 의미들에 대해 다시 알았다. 집집마다 각기 다른 자기집의 술이 빚어졌다는 것에 놀랐고, 그것은 집집마다의 균이 다르기 때문인 것도 감동적이었다. 조상을 경건하고 극진히 모시는 풍습이 있어 자기 집의 제례를 위한 술을 빚었다. 또한 내 집을 찾아 준 손님에게 술을 내주는 것이 예의였으니 집에서 지켜가고 이어가려는 모든 일들은 그대로 마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것이 태도가 되고 삶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마당과 땅에 기대어 사는 삶을 버리고 함께 잃은 것은 오랜 시간 오감으로 이어 온 생활과 삶의 지혜, 자연과 사람에 대한 경의, 그리고 자연이 내 집인 듯 더불어 살아 온 마음인 것이다. 그 상실을 고스란히 자연의 분노로 겪고 있는 이 시절에 속절없이 그리운 풍경인 것이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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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재 利敍齋
‘이롭게 펼치는 집’ 이라는 뜻의 집의 이름이자 작가명이다. 삶과 앎과 집을 하나로 두고자 하는 뜻이 있다.
집의 문화와 뿌리의 미감을 연구하며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작은 한옥 |집, 이서재|를 경영하고 있다. 우리 땅을 걸으며 그 땅이 전하는 뜻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 <땅의 기억, 이서재 지리지>와 2017년 첫 ‘집전’을 기록한 책이자 피아노 음반 <집>을 발간하였다. 집을 열어 우리 뿌리 문화의 귀함을 다시 보고 집의 일상을 함께 나누는 <집 전>을 열고 있다.
아득하게 밀려오는 외할머니의 시골집 풍경이 귀한 것이었다고 여기게 된 것은 먼 타국 땅에서였다. 중소도시의 아파트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여름과 겨울 방학을 외할머니가 계시는 먼 시골로 가서 보냈다. 대가족이었던 할머니 집에서 보낸 설날이나 추석같은 명절, 가족 잔치나 장례, 꽃 상여를 따라 걷던 모습이 마치 다른 세상의 기억처럼 아련히 떠오를 때가 있다. 어쩌면 그 어느 집이더라도 낯설지 않았을 일들이 ‘집의 형태’가 바뀌면서 박물관이나 박제된 민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도 먼 타국에서 우리를 한발 떨어져 보았을 때야 알게 되었다.
마당이 사라진 집은 몸으로 기억 해 왔던 감각과 냄새와 소리를 바꾸어 놓았다. 그때 우리는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인지, 무엇을 바꾸어 놓을지 미처 알지 못했다. 구태한 것을 버리고 더 나은 신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세상을 뒤덮은 플라스틱과 영혼 없이 차려지는 상차림을 만날 때마다 그 예전엔 미처 알 수 없었던 오늘과 맞바꾼 텁텁한 흙 냄새가 그립다고 생각했다. 길가의 미루나무 대신 전신주와 아파트가 놓여진 풍경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미래를 위해 기꺼이 버렸던 그 세계가 가끔은, 몹시, 그리운 것이다.
하얀 눈처럼 포근했던 집의 추억 ⓒ이서재 ⓐ누루커스
할머니 집은 너른 논을 한참 지나고서야 닿았다. 그 길은 계절마다 다른 색과 모습을 지녔다. 높낮이 없이 편편한 도화지 같은 땅에 계절의 색이 입혀졌다. 익어가는 것의 의미를 그때 알았다. 그 너른 논에서 얻은 쌀을 온 가족이 먹었다. 긴 논이 끝날 즈음에 거대한 미루나무가 늘어 서 있는 좁은 흙 길을 지났다. 그 길을 지날 때는 뽀얀 흙 먼지가 일었다. 바람이 불면 커다란 잎이 뒤집어져서 연한 쑥색과 같은 잎사귀의 뒷면이 손바닥 뒤집어 인사하듯 팔랑이던 나무였다. 그 미루나무만 있으면 할머니 집을 혼자서도 찾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 집에 도착하면 사랑채의 서까래에 매단 그네를 타며 툇마루 위에서 놀던 사촌 동생들이 해에 잘 그을려 까만 얼굴을 하고 뛰어 왔다. 드문드문 만난 탓에 만날 때 마다 처음엔 어색했고 논두렁 사이를 뛰어 놀며 금세 친해 졌다. 하얀 한복을 입은 증조 할머니와 머리에 갓을 쓰고 곰방대를 문 증조할아버지가 계셨던 ㅁ자 한옥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마당은 거대한 운동장 같았다. 나이가 한 살씩 먹을 수록 그 마당이 점점 작아진다고 생각했다. 여름에 할머니 집에 가면 삼촌이 운전하는 경운기에 포장천으로 지붕을 만들어 타고 강가나 냇가에서 놀았다. 아이들끼리는 논물이 허리까지 찬 개울에서 헤엄치며 물방개, 개구리를 잡았다. 거머리가 무서우면서도 이 다른 세계의 놀이가 신기하고 즐거웠다. 밤이 되면 동네 친구들과 쥐불놀이를 하거나 숨바꼭질을 했다. 가로등 없이 달빛 만으로도 대낮처럼 밝았다. 밤이지만 한 낮의 운동장처럼 집과 집 사이를 뛰어 놀았다. 여름의 뒷 마당에는 처마 아래에 청포도 나무가 있었다. 집 주변을 뛰어 놀다가 포도나무 아래에 가서는 꼭 청포도를 한 알씩 따 먹었다. 여름은 길고 방학은 짧았다.
겨울 집의 방은 이글이글 끓었다. 부엌에는 큰 가마솥이 두 개 있었고 솥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끓고 있었다. 아궁이에 나무를 넣어 보고 싶어서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불 앞에 서성이고 있으면 어른들은 불장난하면 오줌 싼다고 다그치며 밖으로 내 보냈다. 장날이 되면 숙모와 어린 나는 눈이 와서 종아리 까지 푹푹 빠지던 산길을 걸어 장을 보러 갔다. 나는 달걀이 먹고 싶다고 했고 갓 난 달걀 두 개를 신문지에 싸서 들고 다시 산을 넘어 왔다. 그 길의 겨울 나무는 가지가지마다 눈꽃이 마냥 세상을 신기해 하는 눈동자처럼 반짝였다. 벼베기가 끝이 난 논이 꽁꽁 얼면 썰매를 탔다. 삼촌은 툭툭 나무를 잘라다가 썰매를 잘도 만들었다. 비료 포대도 훌륭한 썰매가 되었다. 눈이 가득 내리면 비료포대를 깔고 좁은 산길을 한 사람씩 미끄러져 내려왔다. 볼은 빨갛게 달아 오르고, 세상은 온통 하얗고, 집집마다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 올랐다. 각 방은 온돌이어서 아랫목이 있었고, 부엌에서 음식을 하며 불을 지피면 방이 뜨거워 졌다. 구들에서 가까운 아랫목은 종이 장판이 고구마 익어가듯 까맣게 타 있었고, 그 바닥에 누우면 너무 뜨거워서 앞 뒤로 번갈아 돌려가며 누웠다. 설날이 되면 할머니가 해주시는 찹쌀떡이 기다려졌다. 절구에 뜨거운 찹쌀을 방망이로 치대어 쫀득해진 떡살에 팥 소를 넣고 넓적한 떡을 만들어 놓으면 누가 먹었는지 금세 사라졌다. 할머니 몰래 몇 개를 가져다가 이불 속에서 동생들과 나누어 먹었다. 겨울은 차갑고 하얗고 뜨겁게 지나갔다.
ⓒ이서재 ⓐ누루커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그 한옥집은 서울 사람에게 팔려 세 등분 되었다. 나무 문을 떼어내고 흰색 샷시 문이 달렸다. 마당과 돼지나 소를 키우던 우리, 우물과 대문도 사라졌다. 큰 외삼촌은 그 집과 논 사이에 양옥집을 새로 지었다. 사계절의 색이 잔물결처럼 일던 논에는 비닐하우스가 들어 섰다. 천연의 색이 융단 같던 논은 플라스틱으로 덮혀져 한치 앞을 가렸다. 마을을 혼자서도 찾아 올 수 있을 것 같았던 흙 길의 미루나무는 잘려나가 멀끔한 길이 되었고 나무 대신 전신주가 늘어섰다. 마을과 마을이 논으로 이어져 평화롭던 이웃의 땅은 거대한 공장들이 세워졌다. 그 어디를 둘러봐도 시로 가득했던 마을이 군인으로 가득 찬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할머니 집에는 가지 못했다.
마당이 사라진 집의 풍경은 달라졌다. 생활이 지혜가 되어 이어가던 집은 주거와 부동산으로 여겨졌으니 그 지혜는 이어오지 못하고 집과 함께 사라졌다. 생의 가장 근본인 의식주가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적응한 지혜로 살아남아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문화를 이룬다. 그 문화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집이야 말로 거대한 서사를 가진 우주가 아니고서야 무엇일까. 삶을 이루는 집의 양식이 달라지는 일은 단순히 거주의 방식이 바뀌는 것 뿐만 아니라 삶을 기반해 쌓여 온 생활 양식과 문화가 함께 사라지는 일이었다. 대대로 이어 오던 일들이 단절 되고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 바뀐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와 ‘시간의 개념’과 ‘삶의 가치관’까지도 바뀌는 일이다. 현대적인 삶이란 무엇에 기준하는 것인가, 그 현대적인 삶으로 가는 시스템으로부터 누가 어떤 이익을 얻는 것인가, 편리한 오늘의 생활은 우리에게 어떤 기억을 감각으로 남기는가, 우리는 그러한 삶을 영위하면서 이전 보다 나은 질의 삶을 살고 있다고 과연 말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오늘의 생활이 더불어 모두를 이롭게 하고 평화로운 마음을 일구게 하는가. 우리가 단 한번도 멈추어 묻지 않고 이 땅을 갈아 엎으며 달려 온 오늘은 사라진 마당과 집 만큼이나 잃어야 하는 것이 많다. 그것은 수 백, 수 천년을 땅에 기대어 이어 온 지혜의 유산을 초고속 엘리베이터의 속도 만큼이나 빠르게 내다 버린 것과 다르지 않다.
집_술 ⓒ이서재 ⓐ누루커스
2015년, 13년만에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집>을 내 자신의 작품과 태도의 중심에 두고자 마음을 먹었다. 자연스레 집의 문화와 더불어 우리 술 문화를 찾아 공부하고 술 빚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술 빚기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의 와인처럼 긴 역사 속에 깃든 우리 술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 술 빚기를 배우며 한국에서 술이 갖는 의미들에 대해 다시 알았다. 집집마다 각기 다른 자기집의 술이 빚어졌다는 것에 놀랐고, 그것은 집집마다의 균이 다르기 때문인 것도 감동적이었다. 조상을 경건하고 극진히 모시는 풍습이 있어 자기 집의 제례를 위한 술을 빚었다. 또한 내 집을 찾아 준 손님에게 술을 내주는 것이 예의였으니 집에서 지켜가고 이어가려는 모든 일들은 그대로 마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것이 태도가 되고 삶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마당과 땅에 기대어 사는 삶을 버리고 함께 잃은 것은 오랜 시간 오감으로 이어 온 생활과 삶의 지혜, 자연과 사람에 대한 경의, 그리고 자연이 내 집인 듯 더불어 살아 온 마음인 것이다. 그 상실을 고스란히 자연의 분노로 겪고 있는 이 시절에 속절없이 그리운 풍경인 것이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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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재 利敍齋
‘이롭게 펼치는 집’ 이라는 뜻의 집의 이름이자 작가명이다. 삶과 앎과 집을 하나로 두고자 하는 뜻이 있다.
집의 문화와 뿌리의 미감을 연구하며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작은 한옥 |집, 이서재|를 경영하고 있다. 우리 땅을 걸으며 그 땅이 전하는 뜻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 <땅의 기억, 이서재 지리지>와 2017년 첫 ‘집전’을 기록한 책이자 피아노 음반 <집>을 발간하였다. 집을 열어 우리 뿌리 문화의 귀함을 다시 보고 집의 일상을 함께 나누는 <집 전>을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