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금융인의 술] 투자의 베일을 벗기는 마법의 필터

누루커스
202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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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한번 술 한잔 하시지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거의 일주일에 서너 번은 이런 안부성 인사를 남발하고 살아온 것 같다. “술”이라는 마법 같은 아이템은 “술자리”라는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는 거대한 믹서기를 마련해주는데, 이 “술자리”에서 아주 많은 문제점들이 해결되거나 생겨나게 된다. 내 나이 마흔 초반을 지나가는 이 시점에서 술이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사실 선명하진 않지만 술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대학교 합격 직후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대학교 첫 학기는 말 그대로 술에 “절어” 살았다. 수업을 마치면 오늘은 어디서 술자리가 열리는지 열심히 알아보았고, 술자리가 없으면 직접 발 벗고 만들었다. 대학 첫 학기에는 술자리야말로 당연히 내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여기기도 했다. 술자리에 가야 “재미”가 있었다. 술에 취해 앞니가 깨지는 불상사를 겪기도 하는 등 돌이켜보면 정말 정신없이 마셨던 시절이었다. 나의 주량도, 주사도 모르는 그런 무지한 상태에서의 술자리는 사실 매우 위험한 장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술은 나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었다.


ⓒ이지훈 ⓐ누루커스


  미국에서 늦깎이 공부를 하던 중 술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사실상 공부와 운동 외에는 딱히 할 것도 없는 당시에는 고만고만한 유학생들끼리 누군가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는 행위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었던 것 같다. 좁은 커뮤니티 안에서 매일이 단조로웠던 작은 동네의 술자리에서는 온갖 가십거리가 생성되고 공유되었다. 그 술자리에 끼지 않으면 언제든 나 역시 가십거리가 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당시 술은 “꼭 즐겨야 하는” 대상이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땐 조금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대학을 짧게 다닌 탓에 사실상 인맥이 많이 흐릿해져 있었다. 운이 좋게도 첫 직장부터 바래왔던(규모는 작지만) 금융권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고, 덕분에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관련업계 사람들이었다. 금융권 사람들은 나름 희한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많은 일들이 “술”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금융인의 삶은 양재에서 여의도로 이어졌고, 여의도 생활은 말 그대로 나의 술인생이 본격적으로 발화된 시점이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던 것 같다. 여의도 증권사 IB라는 부서의 사람들은 여의도에 공급되는 전체주류의 30% 정도는 족히 매일매일 처리해주는 존재들이었다. 여의도는 섬이라는 특성상 여름에는 더 덥고 겨울에는 더 추웠다. 여름에는 유리벽으로 만들어진 건물들이 빛을 반사시켜 더 더웠고, 겨울에는 건물들 사이를 타고 돌아다니는 바람이 안그래도 차가운 바람을 더 차갑게 만들곤 했던 것이다.


ⓒ이지훈 ⓐ누루커스


  이런 삭막한 섬에서 유일한 한줄기 빛은 역시나 퇴근 후 마시는 한잔 아니었을까 싶다. 삼삼오오 모여서 술을 마시던 30대 초반의 뜨내기 금융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잡담을 했는데, 대부분 주식 얘기 20%, 그날 있었던 가십거리 40%, 소개팅한 이성에 대한 얘기 40%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에는 “찌라시”라는 검증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매체가 있어서 대부분의 가십거리는 이 “찌라시”가 발단이 되었다. 문제는 이 “찌라시”의 소문이 가끔은 진짜이기도 해서 주식시장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의도 증권맨들의 가벼운 술자리는 어찌보면 일의 연장선상이 되기도 하였다. 여의도 근무 시절에 술은 나에게는 “소중한 정보통” 이었다.


ⓒ이지훈 ⓐ누루커스


  이후 벤처투자자로 살아온지 10년 정도 되었고, 무대는 여의도에서 강남으로 바뀌었다. 벤처투자자인 나에게 술은 피투자기업의 대표이사를 파악하기에 매우 좋은 수단이 되었다. 벤처투자는 말 그대로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업무이며, 사실상 회사가 아직 무언가 내놓을 만한 숫자가 없는 상태에서 자본을 투입하는 고위험 투자다. 기업은 재무제표를 필연적으로 내놓게 되고, 이 숫자를 바탕으로 투자의사를 결정하게 되는게 일반적이지만, 벤처기업의 경우 이런 상황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투자를 집행할까.


  나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사업성이었다. 그 이후엔 회사의 성장 기대치만큼 시장 또한 성장할 지를 더 많이 고려하게 되었고, 그 다음에는 당시 가장 주목받는 키워드와 관련된 기업에 투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어찌어찌 10년이 흐르고 나니 다 부질없다는 걸 깨달았다.


  현재는 “사람”을 보고 투자하려고 노력한다. 


  개인적으로 투자하기 전이나 후에 반드시 대표이사와 술자리를 가지는 편이다. 당연히 처음에는 딱딱하게 시작된다. 하지만 한 잔, 두 잔, 세 잔 들어가면서 진솔한 이야기가 오가게 되고, 아쉬운 마지막 잔을 들이켤 땐 어느덧 서로에게 느꼈던 장벽이 많이 허물어져 있다. 이 사람이 투자자를 존중하고 책임감 있게 사업을 영위할지 여부를 술자리 몇 번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이 사람의 됨됨이나 그릇 정도는 대충 알 수 있다. 이 정도만 되어도 투자를 검토하는 시점에서는 큰 정보가 될 수 있다.


  간혹 벤처투자 시장에서 술자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네트워킹이나 딜소싱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술자리 영업이나 네트워킹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비난도 많다. 하지만 세상 만사 다 사람이 하는 일이거늘… 급할 때 개인적으로 친밀도가 쌓인 사람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솔직히 현 시점에서는 이러하지만 더 나이를 먹으면 술이 나에게 어떤 존재일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의미로든 술은 내 곁에 존재할 것이다. 좋은 도구처럼 혹은 좋은 친구처럼 말이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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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훈

30대 늦깍이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13년째 금융인으로 살아왔다. 현재는 벤처캐피탈리스트로 창업자들과 소통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