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갗에 닿는 이불의 촉감이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느껴지는 아침, 눈을 뜨기도 전에 물방울 소리가 귀를 깨운다. 창 밖엔 비가 내린다. 가볍고 촉촉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한다. 빗방울이 천천히 떨어지며 하늘과 땅과 그 사이의 사람들에게 쌓인 먼지를 씻어주고 있다. 나뭇가지 마다 핀 연둣빛 새순은 신이 난 듯 위아래로 춤을 춘다. 거리의 풍경은 평소보다 더 선명하고 푸르다.
물을 끓인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공기가 서늘하다. 하지만 난방을 하고 싶진 않다. 봄의 찬 기운은 이제 막 태동하는 생명처럼 느껴져 내 안의 신선한 에너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머그잔에 찻잎을 한 숟가락 넣고 따뜻한 물을 붓는다. 숙성된 녹차의 깊은 풀내음과 겨울에만 핀다는 제주 한란의 맑고 정갈한 꽃향이 피어오른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정화가 되는 것만 같다. 한 모금 삼키자 몸 안이 온기로 채워지고 차가웠던 공간은 아늑한 기분을 위한 배경으로 변한다. 머릿속을 비우고 오롯이 나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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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출근길ⓒnurukers
출근길에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동료 S를 만났다. 쾌활한 성격의 그는 오늘따라 더 들떠보인다. 평소에는 그저 밝은 사람이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오늘은 왠지 나도 미소가 지어진다. 어제의 일과 오늘의 일은 다르지 않지만 어쩐지 오늘은 뭔가 잘 풀리는 기분이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젖은 우산은 아직 마르지 못한 채 사무실 입구에 세워져 있다. 밖을 나설 때에도 발 끝에 튀기는 빗방울이 그리 축축하지 않다. 식사를 한 후 아침에 마셨던 차를 다시 한 번 우렸다. 사무실 안에도 차향이 가득 퍼지고 동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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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가늘어진 빗줄기가 도시의 불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해가 길어지긴 했지만 저녁이라 말하기엔 이른감이 있다. 조용한 어딘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차분히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젖은 자동차와 꽃처럼 피어난 우산들이 조용히 옆을 스쳐 지나간다. 오늘만큼은 왁자한 곳엔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익숙한 곳들을 제외하고 나니 마땅한 곳이 없다. 허탈하다. 발걸음은 여느 때처럼 집으로 향한다.

비오는 날 퇴근길ⓒ nurukers
고요한 집 안은 적막하지만 나를 더 명확하게 느끼게 해준다. 현관엔 즐겨 신는 신발이 가지런하게 놓여있고 거실 의자엔 내가 묻어 있는 수건이 걸려있다. 내 존재의 흔적을 보자 안도감이 생긴다. 느슨해진 빗소리와 밤의 잔상이 창가에 일렁인다. 냉장고를 열자 어제 먹다 남은 밥이 그대로 말라 있다. 밥은 내일도 먹을 수 있으니 그대로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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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두었던 술을 꺼내 잔에 따른다. 수면은 산속의 개울물을 떠낸 것처럼 깨질 듯 투명하다. 잠시 시선을 빼앗겨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은은한 매실향이 코를 타고 들어와 머릿속을 상쾌하게 적신다.
작년 가을 술을 배워 두니 술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이 생겼다. 향과 색, 질감과 목넘김을 알고 나니 술을 즐기는 나름의 방법도 알게 되었다. 오늘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날엔 물처럼 깨끗하고 산뜻한 과일향이 나는 술이 제격이다. 아마 이런 감각은 혼자가 아니면 깨우기 힘들 것이다. 집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 찾아왔지만 창 밖은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를 바쁨으로 분주하다. 일상은 때론 어두워서 화려하고, 외로워서 충만하다.
나는 항상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그 자리를 잘 살펴보면 꼭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다. 나의 순간순간을 함께하는 소중한 모든 것들도 그곳에 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이 술 한잔처럼 말이다.
글 진병우
전통주소믈리에
차와 술의 콜라보|마음을 세워두는 누루커스 주차장
기분이란 것은 다루기 쉽지 않다. 아침에 좋은 기분을 느끼면 하루 종일 정신이 맑고, 한 번 감정이 수틀어지면 잠이 들기 전까지 불편한 끈적임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기분을 안정시켜 줄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안다. 술이다. 술의 본질을 살펴보면 기분과 동의어가 아닐까. 기쁠 땐 단 술을, 슬플 땐 쓴 술을, 신날 땐 가벼운 술을, 울적할 땐 독한 술을 마신다. 기분에 따라 술의 종류가 달라진다. 하지만 여기엔 한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술은 밤에 마시는 게 통상적이고, ‘정상적’으로 보인다는 것. 그럼 낮의 기분은 어떻게 맞춰야 한단 말인가? 그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내 감정에 너무 미안하지 않을까. 밤에 술이 있다면 낮에는 차가 있다. 차는 마음을 가다듬고 감성을 보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밤과 낮의 기분 밸런스를 맞춰주는 술과 차의 콜라보. 전통주 소믈리에이자 티소믈리에인 저자가 소개하는 한국술과 차의 궁합. 가장 한국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마실 거리를 통해 제안해본다. 그때그때 하루의 기분에 조화로운 차와 한국술을 함께 마셔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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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에 닿는 이불의 촉감이 평소보다 더 부드럽게 느껴지는 아침, 눈을 뜨기도 전에 물방울 소리가 귀를 깨운다. 창 밖엔 비가 내린다. 가볍고 촉촉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한다. 빗방울이 천천히 떨어지며 하늘과 땅과 그 사이의 사람들에게 쌓인 먼지를 씻어주고 있다. 나뭇가지 마다 핀 연둣빛 새순은 신이 난 듯 위아래로 춤을 춘다. 거리의 풍경은 평소보다 더 선명하고 푸르다.
물을 끓인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공기가 서늘하다. 하지만 난방을 하고 싶진 않다. 봄의 찬 기운은 이제 막 태동하는 생명처럼 느껴져 내 안의 신선한 에너지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머그잔에 찻잎을 한 숟가락 넣고 따뜻한 물을 붓는다. 숙성된 녹차의 깊은 풀내음과 겨울에만 핀다는 제주 한란의 맑고 정갈한 꽃향이 피어오른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정화가 되는 것만 같다. 한 모금 삼키자 몸 안이 온기로 채워지고 차가웠던 공간은 아늑한 기분을 위한 배경으로 변한다. 머릿속을 비우고 오롯이 나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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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출근길ⓒnurukers
출근길에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서 동료 S를 만났다. 쾌활한 성격의 그는 오늘따라 더 들떠보인다. 평소에는 그저 밝은 사람이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오늘은 왠지 나도 미소가 지어진다. 어제의 일과 오늘의 일은 다르지 않지만 어쩐지 오늘은 뭔가 잘 풀리는 기분이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젖은 우산은 아직 마르지 못한 채 사무실 입구에 세워져 있다. 밖을 나설 때에도 발 끝에 튀기는 빗방울이 그리 축축하지 않다. 식사를 한 후 아침에 마셨던 차를 다시 한 번 우렸다. 사무실 안에도 차향이 가득 퍼지고 동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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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가늘어진 빗줄기가 도시의 불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해가 길어지긴 했지만 저녁이라 말하기엔 이른감이 있다. 조용한 어딘가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차분히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젖은 자동차와 꽃처럼 피어난 우산들이 조용히 옆을 스쳐 지나간다. 오늘만큼은 왁자한 곳엔 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익숙한 곳들을 제외하고 나니 마땅한 곳이 없다. 허탈하다. 발걸음은 여느 때처럼 집으로 향한다.
비오는 날 퇴근길ⓒ nurukers
고요한 집 안은 적막하지만 나를 더 명확하게 느끼게 해준다. 현관엔 즐겨 신는 신발이 가지런하게 놓여있고 거실 의자엔 내가 묻어 있는 수건이 걸려있다. 내 존재의 흔적을 보자 안도감이 생긴다. 느슨해진 빗소리와 밤의 잔상이 창가에 일렁인다. 냉장고를 열자 어제 먹다 남은 밥이 그대로 말라 있다. 밥은 내일도 먹을 수 있으니 그대로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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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두었던 술을 꺼내 잔에 따른다. 수면은 산속의 개울물을 떠낸 것처럼 깨질 듯 투명하다. 잠시 시선을 빼앗겨 바라보고 있는 사이 은은한 매실향이 코를 타고 들어와 머릿속을 상쾌하게 적신다.
작년 가을 술을 배워 두니 술 맛을 음미하는 즐거움이 생겼다. 향과 색, 질감과 목넘김을 알고 나니 술을 즐기는 나름의 방법도 알게 되었다. 오늘처럼 차분히 가라앉은 날엔 물처럼 깨끗하고 산뜻한 과일향이 나는 술이 제격이다. 아마 이런 감각은 혼자가 아니면 깨우기 힘들 것이다. 집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밤이 찾아왔지만 창 밖은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를 바쁨으로 분주하다. 일상은 때론 어두워서 화려하고, 외로워서 충만하다.
나는 항상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만 그 자리를 잘 살펴보면 꼭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니다. 나의 순간순간을 함께하는 소중한 모든 것들도 그곳에 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이 술 한잔처럼 말이다.
글 진병우
전통주소믈리에
차와 술의 콜라보|마음을 세워두는 누루커스 주차장
기분이란 것은 다루기 쉽지 않다. 아침에 좋은 기분을 느끼면 하루 종일 정신이 맑고, 한 번 감정이 수틀어지면 잠이 들기 전까지 불편한 끈적임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기분을 안정시켜 줄 방법은 없을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안다. 술이다. 술의 본질을 살펴보면 기분과 동의어가 아닐까. 기쁠 땐 단 술을, 슬플 땐 쓴 술을, 신날 땐 가벼운 술을, 울적할 땐 독한 술을 마신다. 기분에 따라 술의 종류가 달라진다. 하지만 여기엔 한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술은 밤에 마시는 게 통상적이고, ‘정상적’으로 보인다는 것. 그럼 낮의 기분은 어떻게 맞춰야 한단 말인가? 그저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내 감정에 너무 미안하지 않을까.
밤에 술이 있다면 낮에는 차가 있다. 차는 마음을 가다듬고 감성을 보듬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준비했다.
밤과 낮의 기분 밸런스를 맞춰주는 술과 차의 콜라보. 전통주 소믈리에이자 티소믈리에인 저자가 소개하는 한국술과 차의 궁합. 가장 한국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마실 거리를 통해 제안해본다. 그때그때 하루의 기분에 조화로운 차와 한국술을 함께 마셔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