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선 ⓐ누루커스
동네 친구인 H는 나의 ‘방어 메이트’다. 11월 하순이면 제주 마트의 수산물 코너에서 기름이 잘 오른 두툼한 대방어 회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매일 마트에 들러 확인하다가 마침내 대방어 회가 풀리면 H에게 오늘이 디데이임을 알린다.
올해 방어 데이에는 술을 각자 준비하기로 했다. 나는 와인 매장에서 소비뇽블랑 한 병을, H는 편의점에서 1+1으로 판매하는 샤르도네와 카베르네 소비뇽을 사 가지고 왔다. 먼저 쇼비뇽블랑을 나눠 마신 후 나는 집에 쟁여둔 논알코올 맥주로 갈아 탔고, H는 계속 화이트와인을 마시는 게 좋겠다며 샤르도네를 새로 땄다. 예전에 H와 둘이서 와인 4병을 마셨던 적이 있었지 하면서 논알코올 맥주를 홀짝거렸다. 샤르도네 한 병을 다 마신 H는 잠시 망설이다가 카베르네 소비뇽까지는 못 마실 것 같다면서 남겨두고 돌아갔다. 그 후 한동안 그 와인이 우리 집 선반 위에 남아 있었다.
영화였는지 만화였는지 출처는 확실하지 않지만, 꽤 오래 전부터 뱅쇼를 알고 있었다. 만들기도 쉽고 분위기 내기도 좋은 아이템이었지만 어쩐지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은 없다. 왜 그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뱅쇼의 재료가 문제였다. 오렌지, 사과, 레몬 같은 과일을 준비하는 것이나 시나몬 스틱, 팔각, 정향 등의 향신료를 구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먹다 ‘남은’ 와인이 관건이었다. 와인을 먹다가 남기는 일이 잘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술을 잘 못 마시게 된 후에 이 드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때마침 뱅쇼의 계절인 겨울이었다.
‘뱅쇼(Vin chaud)’는 프랑스어로 ‘따뜻한 와인’이란 뜻이다. 와인에 각종 과일과 향신료를 넣고 끓여서 만드는데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어 감기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주로 겨울에 마시는 음료다. 와인을 끓이기 때문에 알코올은 거의 다 날라간다. 독일에서는 ‘글뤼바인(Glühwein)’, 영국에서는 ‘멀드 와인(mulled wine)’ 등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뱅쇼는 우리나라의 ‘쌍화탕’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술을 끓여서 알코올을 날리는 것이나 약재(향신료), 특히 계피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전주의 ‘모주’가 떠오른다. 차이점이 있다면 뱅쇼는 와인으로, 모주는 막걸리로 만든다는 것 정도.
뱅쇼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만들어도 이게 잘 된 건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제대로 만든 뱅쇼를 마셔보기로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칵테일을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바(bar)가 새로 생겼는데 여기서 겨울을 맞아 뱅쇼를 판매하고 있었다. 처음 맛 본 뱅쇼는 깜짝 놀랄 만큼 맛이 좋았다. 따뜻하게 먹으니 과일 차 같은 느낌이 들었고 생각보다 더 달았다. 부족하면 더 넣으라며 각설탕을 함께 주었는데, 그만큼 뱅쇼는 달게 마시는 음료인 듯했다. 어디선가 스위티한 레드 와인으로 만들면 맛이 더 좋다는 내용을 본 것도 같다.
뱅쇼 맛도 확인했으니 이제 만들어볼 차례다. 과일과 향신료를 각각 구입할 필요 없이 다 들어 있는 뱅쇼 키트가 시중에 잘 나와 있다. 뱅쇼 키트를 인터넷으로 구입한 후 ‘남은’ 와인을 꺼내고 제주에서 재배된 제철 레몬을 곁들여 뱅쇼를 만들어 보았다. 드라이한 레드 와인이기 때문에 설탕을 좀 넉넉하게 넣었다. 팔팔 끊인다는 느낌보다는 낮은 불에서 조린다는 느낌으로 20~30분 정도면 뱅쇼가 완성된다. 식으면 병에 담은 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취향에 따라 그대로 차게 마시거나 한 번 끊여서 뜨겁게 마시면 된다. 마지막에 꿀이나 시럽을 추가해도 좋다.
뱅쇼를 만들고 나니 향긋한 과일 향과 계피, 팔각의 알싸한 향이 집안에 가득했다. 차가운 공기가 내려 앉은 겨울 저녁에 피어 오르는 향기가 퍽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방어 말고도 겨울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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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선
20대는 잡지를 만들며 보냈고, 30대는 여행 콘텐츠를 만들며 보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지만 잘하는 일은 의미를 발견하고 엮어내는 기획과 설계라고 생각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한 삶을 추구하며 제주에서 살고 있다.
ⓒ이정선 ⓐ누루커스
동네 친구인 H는 나의 ‘방어 메이트’다. 11월 하순이면 제주 마트의 수산물 코너에서 기름이 잘 오른 두툼한 대방어 회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이즈음 매일 마트에 들러 확인하다가 마침내 대방어 회가 풀리면 H에게 오늘이 디데이임을 알린다.
올해 방어 데이에는 술을 각자 준비하기로 했다. 나는 와인 매장에서 소비뇽블랑 한 병을, H는 편의점에서 1+1으로 판매하는 샤르도네와 카베르네 소비뇽을 사 가지고 왔다. 먼저 쇼비뇽블랑을 나눠 마신 후 나는 집에 쟁여둔 논알코올 맥주로 갈아 탔고, H는 계속 화이트와인을 마시는 게 좋겠다며 샤르도네를 새로 땄다. 예전에 H와 둘이서 와인 4병을 마셨던 적이 있었지 하면서 논알코올 맥주를 홀짝거렸다. 샤르도네 한 병을 다 마신 H는 잠시 망설이다가 카베르네 소비뇽까지는 못 마실 것 같다면서 남겨두고 돌아갔다. 그 후 한동안 그 와인이 우리 집 선반 위에 남아 있었다.
영화였는지 만화였는지 출처는 확실하지 않지만, 꽤 오래 전부터 뱅쇼를 알고 있었다. 만들기도 쉽고 분위기 내기도 좋은 아이템이었지만 어쩐지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은 없다. 왜 그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뱅쇼의 재료가 문제였다. 오렌지, 사과, 레몬 같은 과일을 준비하는 것이나 시나몬 스틱, 팔각, 정향 등의 향신료를 구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먹다 ‘남은’ 와인이 관건이었다. 와인을 먹다가 남기는 일이 잘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술을 잘 못 마시게 된 후에 이 드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때마침 뱅쇼의 계절인 겨울이었다.
‘뱅쇼(Vin chaud)’는 프랑스어로 ‘따뜻한 와인’이란 뜻이다. 와인에 각종 과일과 향신료를 넣고 끓여서 만드는데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어 감기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주로 겨울에 마시는 음료다. 와인을 끓이기 때문에 알코올은 거의 다 날라간다. 독일에서는 ‘글뤼바인(Glühwein)’, 영국에서는 ‘멀드 와인(mulled wine)’ 등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뱅쇼는 우리나라의 ‘쌍화탕’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술을 끓여서 알코올을 날리는 것이나 약재(향신료), 특히 계피가 들어가는 것을 보면 전주의 ‘모주’가 떠오른다. 차이점이 있다면 뱅쇼는 와인으로, 모주는 막걸리로 만든다는 것 정도.
뱅쇼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만들어도 이게 잘 된 건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먼저 제대로 만든 뱅쇼를 마셔보기로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칵테일을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바(bar)가 새로 생겼는데 여기서 겨울을 맞아 뱅쇼를 판매하고 있었다. 처음 맛 본 뱅쇼는 깜짝 놀랄 만큼 맛이 좋았다. 따뜻하게 먹으니 과일 차 같은 느낌이 들었고 생각보다 더 달았다. 부족하면 더 넣으라며 각설탕을 함께 주었는데, 그만큼 뱅쇼는 달게 마시는 음료인 듯했다. 어디선가 스위티한 레드 와인으로 만들면 맛이 더 좋다는 내용을 본 것도 같다.
뱅쇼 맛도 확인했으니 이제 만들어볼 차례다. 과일과 향신료를 각각 구입할 필요 없이 다 들어 있는 뱅쇼 키트가 시중에 잘 나와 있다. 뱅쇼 키트를 인터넷으로 구입한 후 ‘남은’ 와인을 꺼내고 제주에서 재배된 제철 레몬을 곁들여 뱅쇼를 만들어 보았다. 드라이한 레드 와인이기 때문에 설탕을 좀 넉넉하게 넣었다. 팔팔 끊인다는 느낌보다는 낮은 불에서 조린다는 느낌으로 20~30분 정도면 뱅쇼가 완성된다. 식으면 병에 담은 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취향에 따라 그대로 차게 마시거나 한 번 끊여서 뜨겁게 마시면 된다. 마지막에 꿀이나 시럽을 추가해도 좋다.
뱅쇼를 만들고 나니 향긋한 과일 향과 계피, 팔각의 알싸한 향이 집안에 가득했다. 차가운 공기가 내려 앉은 겨울 저녁에 피어 오르는 향기가 퍽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방어 말고도 겨울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같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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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선
20대는 잡지를 만들며 보냈고, 30대는 여행 콘텐츠를 만들며 보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지만 잘하는 일은 의미를 발견하고 엮어내는 기획과 설계라고 생각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한 삶을 추구하며 제주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