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선 ⓐ누루커스
최고의 논알코올 맥주를 가려내는 기준은 ‘나’다. 내 취향에 맞으면 최고다. 그러니 최고의 논알코올 맥주를 논하기 전에 나의 맥주 취향을 공개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의 종류는 IPA다. IPA는 알코올 도수와 홉의 함량을 높인 맥주다.
IPA가 만들어진 일화는 유명하다. 이름에 힌트가 있는데, 영국 제국주의 시대에 맥주를 배에 실어 인도로 보내면서 맛의 변질을 막기 위해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을 다량으로 넣어 만든 것이 인디안 페일 에일(Indian Pale Ale), 즉 IPA다. 유성관 작가의 에세이 <여름 맥주 영화>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소위 ‘맥덕’이 IPA의 향긋한 아로마에 질릴 때 쯤, 이동할 세 가지 경로가 있는데 첫 번째는 가볍고 상쾌한 라거 맥주로의 회귀, 두 번째는 고제나 람빅 같이 신맛 맥주로의 전환, 그리고 세 번째는 홉을 더 넣고 도수도 센 더블 또는 트리플 IPA로의 진출이다. 나로 말하자면 이 중 세 번째 길을 간 경우다.
점점 더 독한 맥주를 찾아 헤맸다. 맥주에 코를 가져다 대자마자 ‘팡’하고 터지는 화사한 아로마 홉과 진득하게 혀를 감은 뒤 목을 넘길 때 치고 올라오는 알싸하게 쓴맛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알코올 도수가 7~8도 넘어야 만족스러웠고, 삿포로의 한 브루어리에서 IBU(맥주의 쓴맛을 나타내는 지수)가 말도 안 되게 높은 맥주를 만났을 때는 전율이 일었다(얼마 전 다시 찾아보니 아쉽게도 이 브루어리는 더 이상 이런 실험적인 맥주는 만들지 않는 듯했다).
알코올을 제거한 논알코올 맥주는 어쩔 수 없이 맛이 비어 있다. 이것을 무엇으로든 채워야 한다. 만약 라거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안타깝지만, 잘 만든 필스너의 섬세하면서 절묘한 밸런스를 논알코올 맥주가 구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강하고 확실한 맛의 맥주에 끌리는 사람에게는 방법이 있다.
논알코올 맥주의 첫 번째 대안은 ‘홉’이다. IPA를 만들 때처럼 홉을 때려 붓는 것이다.
제주맥주의 ‘제주누보’가 대표적이다. 모자이크 홉과 시트라 홉이 듬뿍 들어간 ‘제주누보’의 IBU는 48로 웬만한 IPA 뺨 친다. 아예 IPA 논알코올 맥주도 나와 있다. 네덜란드 아울치브루잉의 ‘슈퍼볼 논알코올 IPA’와 핀란드에서 만들어진 ‘꾸꼬 논알코올 IPA’다. 슈퍼볼은 알코올을 제거하면서 약해진 풍미를 여섯 가지 아로마 홉으로 채워 넣었다. 꾸꼬는 화사함보다는 진득하고 쌉싸래한 풍미를 잘 구현한 경우다. 촘촘한 맥주 거품도 훌륭하다. IPA는 아니지만 세븐브로잉의 ‘넌, 강서’도 빼놓을 수 없다. 세븐브로잉의 히트작인 ‘강서’ 맥주를 논알코올로 만들었는데, 같은 홉을 사용해서인지 놀랍도록 흡사하다.
논알코올 맥주의 두 번째 대안은 부재료다. 다른 재료로 향을 더하는 것이다.
영국 퍼스트 찹 브루잉의 ‘우 파이애플 사워’가 그런 경우다. 신맛의 맥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오히려 살짝 힘이 빠진 사워 맥주라서 인지 부담스럽지 않고 은은하게 올라오는 파인애플 향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네덜란드의 브루어리 바바리아에는 진저라임, 애플, 레몬의 세 가지 논알코올 맥주가 있다. 이 중 레몬만 마셔봤는데 가향이 자연스럽게 맥주의 구수한 맛과 잘 어우러져서 다른 맛도 궁금해졌다.
세 번째는 밀맥주나 흑맥주 같이 몰트의 개성이 확실한 경우다.
밀 맥아로 만든 맥주는 바나나와 망고 같은 열대 과일의 풍미가 가득하다. 세븐브로잉에서 나온 ‘대표 논알코올’은 한창 인기몰이를 했던 밀맥주 ‘곰표’의 논알코올 버전으로, 산뜻하고 향긋한 밀맥주 특유의 맛을 잘 구현했다. 벨기에의 로만 브루어리에서 만든 ‘라몬 논알코올’의 경우 밀 맥아를 첨가한 라거 맥주다. 달콤하게 올라오는 열대 과일의 풍미로 맛을 채운 것이다. 반면, 고온에서 로스팅해 까맣게 된 보리 맥아를 첨가한 흑맥주는 초콜릿이나 커피의 풍미를 즐길 수 있다. 국내 유일의 논알코올 맥주 브루어리인 부족한녀석들에서 출시한 ‘어프리데이 스타우트’는 기네스와 같은 아이리쉬 스타우트 스타일의 맥주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거품과 묵직한 초콜릿 풍미가 제대로다.
ⓒ이정선 ⓐ누루커스
나의 취향을 생각한다면 첫 번째 카테고리에 정답이 있다. 그리고 최종 1등은 조금 싱겁게도 ‘제주누보’다. 맛뿐 아니라 가격과 구입 편의성에서도 제주누보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 논알코올 맥주 탐험을 하게 된 계기가 제주누보였다. 제주누보보다 더 괜찮은 논알코올 맥주를 찾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시작된 여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제주누보를 뛰어넘는 논알코올 맥주는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탐험이 아직 부족해서일 것이다. 조만간 다시 도전할 생각도 있다. 그 시기는 일단,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십 캔의 논알코올 맥주를 다 마신 후다.nurukers
ⓒ이정선 ⓐ누루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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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선
20대는 잡지를 만들며 보냈고, 30대는 여행 콘텐츠를 만들며 보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지만 잘하는 일은 의미를 발견하고 엮어내는 기획과 설계라고 생각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한 삶을 추구하며 제주에서 살고 있다.
ⓒ이정선 ⓐ누루커스
최고의 논알코올 맥주를 가려내는 기준은 ‘나’다. 내 취향에 맞으면 최고다. 그러니 최고의 논알코올 맥주를 논하기 전에 나의 맥주 취향을 공개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의 종류는 IPA다. IPA는 알코올 도수와 홉의 함량을 높인 맥주다.
IPA가 만들어진 일화는 유명하다. 이름에 힌트가 있는데, 영국 제국주의 시대에 맥주를 배에 실어 인도로 보내면서 맛의 변질을 막기 위해 방부제 역할을 하는 홉을 다량으로 넣어 만든 것이 인디안 페일 에일(Indian Pale Ale), 즉 IPA다. 유성관 작가의 에세이 <여름 맥주 영화>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소위 ‘맥덕’이 IPA의 향긋한 아로마에 질릴 때 쯤, 이동할 세 가지 경로가 있는데 첫 번째는 가볍고 상쾌한 라거 맥주로의 회귀, 두 번째는 고제나 람빅 같이 신맛 맥주로의 전환, 그리고 세 번째는 홉을 더 넣고 도수도 센 더블 또는 트리플 IPA로의 진출이다. 나로 말하자면 이 중 세 번째 길을 간 경우다.
점점 더 독한 맥주를 찾아 헤맸다. 맥주에 코를 가져다 대자마자 ‘팡’하고 터지는 화사한 아로마 홉과 진득하게 혀를 감은 뒤 목을 넘길 때 치고 올라오는 알싸하게 쓴맛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알코올 도수가 7~8도 넘어야 만족스러웠고, 삿포로의 한 브루어리에서 IBU(맥주의 쓴맛을 나타내는 지수)가 말도 안 되게 높은 맥주를 만났을 때는 전율이 일었다(얼마 전 다시 찾아보니 아쉽게도 이 브루어리는 더 이상 이런 실험적인 맥주는 만들지 않는 듯했다).
알코올을 제거한 논알코올 맥주는 어쩔 수 없이 맛이 비어 있다. 이것을 무엇으로든 채워야 한다. 만약 라거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안타깝지만, 잘 만든 필스너의 섬세하면서 절묘한 밸런스를 논알코올 맥주가 구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강하고 확실한 맛의 맥주에 끌리는 사람에게는 방법이 있다.
논알코올 맥주의 첫 번째 대안은 ‘홉’이다. IPA를 만들 때처럼 홉을 때려 붓는 것이다.
제주맥주의 ‘제주누보’가 대표적이다. 모자이크 홉과 시트라 홉이 듬뿍 들어간 ‘제주누보’의 IBU는 48로 웬만한 IPA 뺨 친다. 아예 IPA 논알코올 맥주도 나와 있다. 네덜란드 아울치브루잉의 ‘슈퍼볼 논알코올 IPA’와 핀란드에서 만들어진 ‘꾸꼬 논알코올 IPA’다. 슈퍼볼은 알코올을 제거하면서 약해진 풍미를 여섯 가지 아로마 홉으로 채워 넣었다. 꾸꼬는 화사함보다는 진득하고 쌉싸래한 풍미를 잘 구현한 경우다. 촘촘한 맥주 거품도 훌륭하다. IPA는 아니지만 세븐브로잉의 ‘넌, 강서’도 빼놓을 수 없다. 세븐브로잉의 히트작인 ‘강서’ 맥주를 논알코올로 만들었는데, 같은 홉을 사용해서인지 놀랍도록 흡사하다.
논알코올 맥주의 두 번째 대안은 부재료다. 다른 재료로 향을 더하는 것이다.
영국 퍼스트 찹 브루잉의 ‘우 파이애플 사워’가 그런 경우다. 신맛의 맥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오히려 살짝 힘이 빠진 사워 맥주라서 인지 부담스럽지 않고 은은하게 올라오는 파인애플 향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네덜란드의 브루어리 바바리아에는 진저라임, 애플, 레몬의 세 가지 논알코올 맥주가 있다. 이 중 레몬만 마셔봤는데 가향이 자연스럽게 맥주의 구수한 맛과 잘 어우러져서 다른 맛도 궁금해졌다.
세 번째는 밀맥주나 흑맥주 같이 몰트의 개성이 확실한 경우다.
밀 맥아로 만든 맥주는 바나나와 망고 같은 열대 과일의 풍미가 가득하다. 세븐브로잉에서 나온 ‘대표 논알코올’은 한창 인기몰이를 했던 밀맥주 ‘곰표’의 논알코올 버전으로, 산뜻하고 향긋한 밀맥주 특유의 맛을 잘 구현했다. 벨기에의 로만 브루어리에서 만든 ‘라몬 논알코올’의 경우 밀 맥아를 첨가한 라거 맥주다. 달콤하게 올라오는 열대 과일의 풍미로 맛을 채운 것이다. 반면, 고온에서 로스팅해 까맣게 된 보리 맥아를 첨가한 흑맥주는 초콜릿이나 커피의 풍미를 즐길 수 있다. 국내 유일의 논알코올 맥주 브루어리인 부족한녀석들에서 출시한 ‘어프리데이 스타우트’는 기네스와 같은 아이리쉬 스타우트 스타일의 맥주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거품과 묵직한 초콜릿 풍미가 제대로다.
ⓒ이정선 ⓐ누루커스
나의 취향을 생각한다면 첫 번째 카테고리에 정답이 있다. 그리고 최종 1등은 조금 싱겁게도 ‘제주누보’다. 맛뿐 아니라 가격과 구입 편의성에서도 제주누보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 논알코올 맥주 탐험을 하게 된 계기가 제주누보였다. 제주누보보다 더 괜찮은 논알코올 맥주를 찾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시작된 여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제주누보를 뛰어넘는 논알코올 맥주는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탐험이 아직 부족해서일 것이다. 조만간 다시 도전할 생각도 있다. 그 시기는 일단,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십 캔의 논알코올 맥주를 다 마신 후다.nurukers
ⓒ이정선 ⓐ누루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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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선
20대는 잡지를 만들며 보냈고, 30대는 여행 콘텐츠를 만들며 보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지만 잘하는 일은 의미를 발견하고 엮어내는 기획과 설계라고 생각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한 삶을 추구하며 제주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