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유미 ⓐnurukers
“키야~!” 퇴근 후 맥주 한 모금. TV 광고 속 연예인이 낼 법한 상투적인 소리가 내 목에서 정확하게 나오는게 신기하다. 맥주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날 퇴근 후 첫 잔은 역시 맥주다. 상투적인 한국 라거만이 품을 수 있는 강한 탄산의 청량함이 오늘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라는 신호탄을 축포처럼 쏘아 올린다.
오늘은 여러 배치를 블렌드해, 술 맛을 잡는 작업을 했다. 이쁜꽃의 술은 매 배치 같은 맛이 나지는 않는다. 그 때 그 때 균의 배합을 예측하기 어려운 재래 누룩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업 양조로 적합한 방식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은 필연성에 우연성을 더한 제법으로 약간의 다이나믹과 스릴을 끌어 들이는 재미를 즐기고 있다. 때때로 입에 넣자마자 눈이 동그래질 만큼 맛있는 술이 나오기도 하고, 좀 재미없는 맛이 날 때도 있지만 이 또한 숙성으로 얼마든지 중후해 질 수 있다.
믿어주기만 한다면, 술은 미지의 가능성을 품기 시작한다. 사람같다.
중심에 기준이 되는 맛의 기둥을 세워두고, 여러 배치를 섞어 계절과 시기에 맞춰 맛을 잡는다. 여름엔 라이트한 질감과 산미를 강조해왔는데, 찬바람이 불어오니 나부터 응축된 맛에 끌린다. 오래 숙성한 배치들이 빛을 볼 차례다. 이 작업을 할 때에는 이른 아침 공복으로 출근해 여러 배치를 테이스팅한다. 입에 술을 조금 머금고, 공기와 함께 후루룩 후루룩 이리저리 굴려보고, 후비강에서 다시 콧구멍으로 큼큼하고 숨을 빼서 향을 맡는다. 남한테 보여주기 곤란한 모습과 소리가 난다. 간혹 가다 식사 자리에서 “좋은 술은 이렇게 즐기는 거래.” 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적합하지 않다. 이 행위는 생산자나 판매자가 술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러 사람이 모인 즐거운 자리에서 하기에는 다소 노골적인 과정이오니 주의해주세요.
여러 종류의 시음을 할 때에는 대체로 술을 다시 뱉기 때문에, 입 안에 머금는 동안 술의 정보를 최대한 파악해야 한다. “꿀꺽” 아이고.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냥 목구멍 뒤로 술을 넘겨버린다. 좀 더 노련해지면 뱉을 수도 있으려나. 아직은 이렇게까지 해야 알 수 있다. 맛을 다 잡았으면, 특별한 술잔이 아니라 대충 어디에나 있음직한 물컵에 7부 정도 따르고,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켜고 30분 정도에 걸쳐 마셔본다. 이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빙의하는 과정이다. 온도에 따라서 튀어나오는 맛이나, 향은 없는지 살핀다. 이 때에는 음식이 없기 때문에 내 입에는 서서히 누적되며 강하게 느껴질 정도가 소비자에게는 딱 좋았다. 이 정도라면 됐다. 괜찮다. 하면 이 날의 업무는 이것으로 끝이다.
하루 종일 호록호록 이 술 저 술 마시다, 넷플릭스나 보면서 한 잔 쭉 들이키는게 일과라니. 스스로도 좀 그런가? 싶을 때도 있지만 술이 최종 유저와 만나는 단계를 시뮬레이션 해보는 양조의 꽃과도 같은 단계다. 우리가 만든 술을 마시는 사람의 어떤 모먼트와 함께 할 지, 또 어떤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그에게 완전히 입각해 상상해보는 시간. 이 날은 다른 업무 없이, 오직 이 시간만을 위해 온전한 하루를 배정한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 싶으면, 정리하고 양조장을 나서서 어린이집에 맡겨둔 딸래미와 함께 하원한다. 저녁을 먹고, 아기를 재우고 육퇴를 하면 완전한 하루의 끝. 드디어 퇴근주를 마실 시간이 왔다.
이런 날의 퇴근주는 역시 맥주. 양조장이 혼을 갈아 만든 스페셜한 수제 맥주나 고심해서 고른 4캔 만원 맥주 같은 것이 아니라, 무려 메가 페트에 담긴 2L 카스다. 집에는 -5도로 맞춰진 술장고가 있다. 이런 심플한 라거는 온도만 낮다면, 탄산이 충분히 용해되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먹다 먹다 찾아낸, 최적의 퇴근 맥주다. 하루 종일 테이스팅을 하며 다양한 술들이 재잘재잘 쏟아내는 이야기를 들어줬으니, 이제는 말 수가 적은 묵묵한 친구에게 소회를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랄까? 한결같은 속 깊은 이 친구가 더 없이 고맙다. “키야~!”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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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양유미
가장 동시대적인 술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이쁜꽃의 디렉터.
ⓒ양유미 ⓐnurukers
“키야~!” 퇴근 후 맥주 한 모금. TV 광고 속 연예인이 낼 법한 상투적인 소리가 내 목에서 정확하게 나오는게 신기하다. 맥주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날 퇴근 후 첫 잔은 역시 맥주다. 상투적인 한국 라거만이 품을 수 있는 강한 탄산의 청량함이 오늘은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라는 신호탄을 축포처럼 쏘아 올린다.
오늘은 여러 배치를 블렌드해, 술 맛을 잡는 작업을 했다. 이쁜꽃의 술은 매 배치 같은 맛이 나지는 않는다. 그 때 그 때 균의 배합을 예측하기 어려운 재래 누룩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업 양조로 적합한 방식은 아닐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은 필연성에 우연성을 더한 제법으로 약간의 다이나믹과 스릴을 끌어 들이는 재미를 즐기고 있다. 때때로 입에 넣자마자 눈이 동그래질 만큼 맛있는 술이 나오기도 하고, 좀 재미없는 맛이 날 때도 있지만 이 또한 숙성으로 얼마든지 중후해 질 수 있다.
믿어주기만 한다면, 술은 미지의 가능성을 품기 시작한다. 사람같다.
중심에 기준이 되는 맛의 기둥을 세워두고, 여러 배치를 섞어 계절과 시기에 맞춰 맛을 잡는다. 여름엔 라이트한 질감과 산미를 강조해왔는데, 찬바람이 불어오니 나부터 응축된 맛에 끌린다. 오래 숙성한 배치들이 빛을 볼 차례다. 이 작업을 할 때에는 이른 아침 공복으로 출근해 여러 배치를 테이스팅한다. 입에 술을 조금 머금고, 공기와 함께 후루룩 후루룩 이리저리 굴려보고, 후비강에서 다시 콧구멍으로 큼큼하고 숨을 빼서 향을 맡는다. 남한테 보여주기 곤란한 모습과 소리가 난다. 간혹 가다 식사 자리에서 “좋은 술은 이렇게 즐기는 거래.” 하면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적합하지 않다. 이 행위는 생산자나 판매자가 술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러 사람이 모인 즐거운 자리에서 하기에는 다소 노골적인 과정이오니 주의해주세요.
여러 종류의 시음을 할 때에는 대체로 술을 다시 뱉기 때문에, 입 안에 머금는 동안 술의 정보를 최대한 파악해야 한다. “꿀꺽” 아이고.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냥 목구멍 뒤로 술을 넘겨버린다. 좀 더 노련해지면 뱉을 수도 있으려나. 아직은 이렇게까지 해야 알 수 있다. 맛을 다 잡았으면, 특별한 술잔이 아니라 대충 어디에나 있음직한 물컵에 7부 정도 따르고,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켜고 30분 정도에 걸쳐 마셔본다. 이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빙의하는 과정이다. 온도에 따라서 튀어나오는 맛이나, 향은 없는지 살핀다. 이 때에는 음식이 없기 때문에 내 입에는 서서히 누적되며 강하게 느껴질 정도가 소비자에게는 딱 좋았다. 이 정도라면 됐다. 괜찮다. 하면 이 날의 업무는 이것으로 끝이다.
하루 종일 호록호록 이 술 저 술 마시다, 넷플릭스나 보면서 한 잔 쭉 들이키는게 일과라니. 스스로도 좀 그런가? 싶을 때도 있지만 술이 최종 유저와 만나는 단계를 시뮬레이션 해보는 양조의 꽃과도 같은 단계다. 우리가 만든 술을 마시는 사람의 어떤 모먼트와 함께 할 지, 또 어떤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그에게 완전히 입각해 상상해보는 시간. 이 날은 다른 업무 없이, 오직 이 시간만을 위해 온전한 하루를 배정한다. 이 정도로 충분하다 싶으면, 정리하고 양조장을 나서서 어린이집에 맡겨둔 딸래미와 함께 하원한다. 저녁을 먹고, 아기를 재우고 육퇴를 하면 완전한 하루의 끝. 드디어 퇴근주를 마실 시간이 왔다.
이런 날의 퇴근주는 역시 맥주. 양조장이 혼을 갈아 만든 스페셜한 수제 맥주나 고심해서 고른 4캔 만원 맥주 같은 것이 아니라, 무려 메가 페트에 담긴 2L 카스다. 집에는 -5도로 맞춰진 술장고가 있다. 이런 심플한 라거는 온도만 낮다면, 탄산이 충분히 용해되어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먹다 먹다 찾아낸, 최적의 퇴근 맥주다. 하루 종일 테이스팅을 하며 다양한 술들이 재잘재잘 쏟아내는 이야기를 들어줬으니, 이제는 말 수가 적은 묵묵한 친구에게 소회를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랄까? 한결같은 속 깊은 이 친구가 더 없이 고맙다. “키야~!”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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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양유미
가장 동시대적인 술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이쁜꽃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