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ON 1]양촌양조ㅣ100년의 술, 미래의 술

2020-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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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urukers

양조장 가는 길

논산하면 한국 사람 모두 공통된 장면을 떠올린다. 육군훈련소. 입소하는 젊은이와 눈물 흘리는 가족들. 그 이미지가 너무 강렬한지라 다른 정보들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의아하겠지만 논산은 사실 호남평야에 속한다. 

곡식이 풍부한 지정학적 조건은 양조장에게 매우 중요하고, 그러한 점에서 100년을 이어온 논산의 양촌 양조가 가진 역사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양촌면은 시골마을답지 않게 정비가 잘 되어 있다. 마을의 규모는 작지만 길이 넓고 반듯하다. 한 때는 사람들의 왕래가 꽤나 많은 곳이 아니었나 추측해보았다. 

특이한 점은 마을을 들어오기 위한 입구가 고속도로 출구와 바로 이어져 있고 1차선임에도 불구하고 하이패스 통과구간이 있다는 것이다. 하이패스가 없으면 한참을 돌아와야 하는데 그 거리가 너무 멀어서 가다가 그냥 집으로 갈까하는 하는 고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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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의 시간을 쌓은 양조장

양조장 문 앞으로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주차장보다 광장에 가깝다. 마을의 중심부이기도 해서 주민들이 모이는 일도 많았을 거고 아마 술을 사러 오가는 이도 많았으리라. 농촌마을에선 양조장이 가장 크고 중요한(?) 시설인지라 옛적부터 좋은 입지를 차지했다고 한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100년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진득한 누룩향이 고두밥에서 피어 오른 수증기를 타고 날아와 살갗에 닿는다. 익숙한 할아버지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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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다는 듯 이동중 대표가 나와 손님을 반긴다. 얼마나 많은 방문객을 응대 하였는지 양조장 소개가 자동으로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왼쪽엔 발효실이, 오른쪽엔 사무실이 있는데 옛모습 그대로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 쓰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술을 빚는 공간은 두 층으로 나누어 아랫층은 술을 발효시키는 곳으로, 윗층은 고두밥을 식히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윗층 바닥엔 구멍이 뚫려 있어 식힌 고두밥을 바로 아래로 내려 보낼 수 있게 되어 있다. 

윗층은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보존해 놓았는데 대들보엔 일제시대의 상량문이 온전히 남아 지난 세월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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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으로 걸음을 옮기면 지금까지 써온 양조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작은 박물관을 보는 것처럼 신기하다.


“그때는 이해를 못했지. 어머니가 저걸 왜 안버리고 모아 놓으셨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현명하셨던 것 같아.”


어머니 덕분에 양조장은 100년 동안의 이야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사려깊은 마음만은 전시물들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뒤쪽으로 돌아가면 손님을 맞는 공간이자 카페로 활용하고 있는 건물이 나오는데 이 또한 과거엔 술을 판매하는 창구였다. 양조장을 한바퀴를 둘러보았을 뿐인데 어느새 과거로 시간여행을 온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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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빚는다는 것

9남매중 넷째로 태어나 다른 형제들은 성장하면서 모두 도시로 떠났지만 이동중 대표는 부모님과 함께 농촌에 남았다. 가업으로 이어져오던 양조장을 곁에서 지켜보며 막걸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생겼다. 

하지만 양조장은 쉬는 날이 없고 밤낮도 없다. 새벽에도 술을 보아야 한다. 젊을 때는 참 힘들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저절로 새벽에 깬다. 그럴 때면 밖으로 나와 술맛을 보고 향을 맡아본다. 이 때가 감각이 가장 생생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계가 발달해도 술은 생명체이기 때문에 기계에 의지하면 안되는겨.

사람이 관찰하고 돌봐줘야 혀. 기계는 오차가 날 수 있고 고장이 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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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이야기

어느 날, 젊은 세대의 입맛이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고급지면서 친환경 추세에 맞는 술을 만들기로 했다. 농업진흥청과 함께 연구해 우리나라 청주에 가장 알맞은 효모균을 개발, 배양하여 탄생한 것이 우렁이쌀청주다. 이 신제품을 왜 살균주로 하셨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결론은 ‘변화’였다.


“보관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소비자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 거지. 

옛날 그대로의 방식만 고집하면 발전할 수가 없는 거자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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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의 양조장으로서는 전통을 무시할 수 없었을 터인데 과감하고 개방적으로 변화를 수용했다. 언제나 호탕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짐작은 했지만 진정 대인배임을 제대로 확인했다. 

원료의 중요성과 대중화를 위한 적절한 가격도 강조했다. 좋은 품질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람들이 사 먹을 수 있어야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왜 우렁이 쌀인지 묻자, 오랜 친구가 벼농사를 짓는데 거기서 계약재배를 한다고, 그냥 그 친구가 우렁이쌀을 재배하는 것일 뿐이라는 말에 호방한 웃음이 터졌다. 지역민간의 두터운 신뢰가 느껴졌다. 

이번엔 누룩이 궁금해졌다. 보통은 흩임누룩이라 하면 쌀을 재료로 하는데 이곳은 밀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조장은 지역에서 사랑받고 성장했자너. 지역민의 입맛을 지켜주는 것 또한 하나의 의무지.

쌀로 누룩을 만들면 지역특산주로 해서 온라인으로 더 많이 팔 수 있는데 안한겨. 욕심부리면 안되는겨.”


더 많은 수익을 위해 동네 주민들에게 익숙한 밀 맛을 버릴 수 없다는 단호함. 이러한 자부심과 뿌리깊은 지역사랑이 격동의 세월을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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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조장은 혈연, 성별을 떠나 관심있는 사람이 이어나가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은 양촌양조의 또다른 진화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농약병을 술병으로 사용한 혁신, 레드닷디자인 수상이라는 파란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

 


양촌양조의 술

여러가지 술을 생산하고 있지만 역시 눈에 띄는 건 우렁이쌀 청주다. 농약병을 연상시키는 병모양도 특이하지만 일본 사케와 한국 약주의 중간 어디쯤을 연상시키는 색다른 맛이다. 

일본술처럼 단순하지도, 한국술처럼 묵직하지도 않다. 이유는 누룩이다. 한국에서 누룩으로 주로 사용하는 밀을 일본에서 주로 쓰는 입국방식으로 만들었다. 대학연구소와 협업을 통해 개발했다고 하는데 전통과 현대과학이 만들어낸 좋은 사례가 아닐까 싶다. 

결과적으론 깔끔한 뒷맛과 곡물이 가진 다양한 개성을 모두 살린 훌륭한 술이 만들어졌다. 한 모금만 마셔도 한국술의 미래가 눈 앞에 그려진다.



누루커스 memo/Tip

양조장 바로 뒤로 인내천이 흐르고 선대 어르신이 심으셨다는 거목 아래 평상이 놓여있다.

날이 좋으면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여유를 즐기는 곳이라는데 한가롭기 그지없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천연 테라스에 누워 술 한잔과 그 안에 담긴 세월을 음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