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산책]매우 진지하게 떠올리는 주사의 추억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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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에 취하면 사람은 정확히 두 부류로 나뉜다. 에너지가 치솟거나 소멸하거나. 그 중간은 취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에 논하지 않는다.


  에너지가 소멸하면 대개는 잠이 든다. 그러면 다행인데 에너지가 치솟으면 통제하기 어려운 비일상적인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갑자기 뛰쳐나가 주변을 달린다던지, 슬픈 기억이 증폭되어 눈물을 쏟는다던지, 이유 없이 타인에게 시비를 걸고 폭력을 휘두르는 행위들이 그것이다. 차마 눈뜨고 보기 민망한 상황들이다.


  주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꼭 떠오르는 일화가 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직장의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 자리, 이틀동안 이어지는 교육의 첫 날 저녁이었다. 임원들과 함께 회사 부근의 횟집에서 식사를 하며 신입들의 긴장상태를 즐기는(?) 재롱잔치가 벌어졌다. (업계의 폐쇄성과 권위주의 탓에 여전히 구태문화가 남아있었다.) 

  다소 소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는데 회사가 지역에서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사내문화가 지역사회에 수용되었는지 다른 손님들 모두가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오히려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입사 동기중 가장 신나게 놀던 왜소한 체구의 여성동기(굳이 젠더를 밝히는 이유는 편견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관용적으로 받아 들여지고 오히려 부추기기도 하는 남성중심의 술자리 문화가 일정부분 기여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는 차분했던 좀 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식당에서 춤을 추다가 어느 순간부터 마주치는 모든 사람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넌 뭐야’라는 추임새와 함께. 

  입사동기 중 한 명의 안경이 부러졌고, 그녀를 채용하기로 결정한 인사팀의 부장도 허공을 가르는 스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우슈를 배웠던 나는 민첩하게 방어할 수 있었다.) 마침내 끌려 나간 그녀는 밖에서 해방감을 만끽하며 뛰어다녔다. 상상치 못한 전개 속에서 우리 모두는 주사에 한계가 없음을 깨달았고, 술꾼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기상천외한 광경 속에서 사뭇 겸손해졌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아니 그럴수가 라고 놀란 분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술을 과하게 마시지 않는 나는 그 날의 사건을 맨정신으로 가장 감당하기 힘들었던 주사로 손꼽는다. 술을 마셨을 때의 행동이 사람의 본연적 기질에 상당 부분 기인한다면, 평소 그 기질을 억제하고 있는 이성의 힘에 새삼 놀랄 수밖에 없다. 사회 구동을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술을 취하려고 마신다는 분들을 꽤나 많이 만나 보았는데 다행히 극단적인 경우는 없었다. 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취해도 알코올을 관계 맺음 또는 자신의 정서를 위해 활용하는 수단으로 삼는 게 아닐까? 

  이제 이성을 문 밖에 내 놓을 만큼 체력도 안되거니와 술을 애정으로 바라본다면 이성도 함께 아껴주도록 해야겠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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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우

술자리에 부르면 거의 거절하는 법이 없다. 다만 조용히 야금야금 먹을 수 있는 증류주 쪽을 선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