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산책]여행의 완성은 현지의 술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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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우


  과거 여행들을 돌이켜보면 시각적으로 즐겼던 볼거리나 장소는 웬만큼 강렬하지 않고는 금세 잊혀져 기억이 희미하다. 유명 관광지나 맛집 역시 마찬가지다. 같은 여행지를 여러 번 방문하다 보면 기시감이 들 때가 있는데, 실제로 가본 곳이었지만 전혀 기억에 남아있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마 본인의 여행을 더듬어 본다면 의외로 시각적인 단서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선명한 기억을 자부했지만 추억으로 왜곡되어 있던 경우도 드물지 않다. 멋진 풍경에 매료돼 떠나지만 정작 공간의 기억은 가장 먼저 휘발되어 사라진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반면에 정서적으로 느꼈던 경험들 즉, 낯선 사람과의 대화, 그곳의 분위기, 감정의 변화 등은 의외로 오래 지속된다. 우리가 지난 여행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 행위의 이면에는 그 날의 ‘정보’가 아닌 ‘경험’의 영향이 숨어 있다. 경험이 있어야 회상할 추억도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상으로 멋진 여행지를 보면서 최종적으로 드는 생각은 결국 ‘가보고 싶다.’이다. 바로 경험에 대한 갈구인 것이다.


  여행의 경험 중에서도 큰 영향을 발휘하는 것이 술이다. 여행에서의 술은 감정을 위한 종합선물세트다. 찬찬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현지의 술은 여러가지 면에서 기억각인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번째로, 술은 긴장을 누그러뜨리고 감각의 근육을 이완시킨다. 어느 지역이건 그 지역의 술이 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국적인 맛을 음미하며 여행을 실감한다. 온몸 구석구석 스며드는 그곳만의 액체에 취해 노곤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내가 그곳에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두번째로, 술자리엔 사람이 있다. 술자리에선 대화의 거리낌이 사라진다. 여행지에서 한껏 열어젖힌 마음으로 누구에게든 말을 걸 용기가 생긴다. 낯선 이방인과는 서로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서로 다른 모습과 문화를 이야기하며 하염없이 웃고 있노라면 여행지는 어느새 행복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세번째로, 술은 감정을 증폭시킨다. 일상을 벗어나 가까스로 도착한 여행지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거리도 건물도 아름답기 그지없으며 감상에 젖어 주변의 모든 면면이 낭만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그 곳에서의 술 한 잔은 풍경의 일부가 되고 나는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현지의 술은 추억을 가슴에 새기도록 해준다. 술 덕분에 잊었던 나의 감정을 발견하고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절에 연민을 느끼며 여행은 인생의 한 챕터에 저장되고 마무리된다.


  다소 현란하게 표현했지만 술은 그만큼 여행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용기내 표현하자면 여행을 이루는 기둥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술이 과연 그 정도로 중요한가 반박할 여지도 물론 있을테고, 여행에서의 추억은 다양한 이유에서 생긴다는 것에 이견이 없지만, 술이 여행의 채도를 높여준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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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병우

이성과 감성의 경계에서 살아간다. 광범위한 관심사 탓에 에너지 소모량이 높아 가끔 낮에도 방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