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산책]휴전국가의 폭탄사랑

2024-03-04
조회수 286

ⓒ진병우



  대한민국의 70세 이하 인구는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전쟁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군사정권과 군대문화에서 비롯된 ‘전쟁의 사회화’ 탓이 클 텐데 그러한 집단 기억은 무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먹거리 네이밍에도 영향을 주었다.


폭탄피자,

폭탄 계란찜,

육즙폭탄 함박스테이크,

치즈폭탄 치즈버거,

그리고

폭탄주까지.


  무언가 듬뿍 들어있다는 의미를 왜 폭탄이라는 단어를 빌려와 표현했는지 선뜻 이해가 되진 않지만 직관적으로 그 강력함이 마음에 전달되는 듯하다. 부정에도 긍정에도 폭탄이라고 쓰면 이상하게도 단박에 납득이 된다. 이토록 친숙한 폭탄이라니.


  그 중의 백미는 역시 폭탄주다. 폭발성도 없고, 양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냥 술끼리 섞는 건데 왜 폭탄주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화학작용을 빗댄 것일까. 다음 날 머리가 폭발한다는 걸까. 어찌됐든 이성으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작명이지만 마음으로는 이해가 된다. 신기하다.


  양주방이라는 고문헌에 막걸리와 소주를 섞은 ‘혼돈주(混沌酒)’라는 레시피도 나오고, 산업혁명 당시 영국 노동자가 싸게 빨리 취하려고 마셨다는 썰도 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폭탄 같은 과격한 표현을 쓰진 않았다.


  우리는 매일 같이 폭발물 곁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드물지 않게 그 폭발물을 먹기도 한다. 참 위험한 나라다. 세계 여러 곳을 가 보았지만 우리만큼 터프한 나라는 없었다. 전투민족이라 불리는 마오리족, 몽골인도 이토록 자주 폭발물을 먹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폭탄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알게 되면 그들도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문화가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만큼 화끈하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이라는 증거이니까. 그 덕분에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폭탄’같은 문화파급력을 지니게 되지 않았는가. 폭탄은 이제 우리의 개성이자 정체성이 되어 간다. 다만 그 폭탄이 잠재적인 지뢰가 되지 않기만을 빌 뿐이다.nurukers



--

진병우

이성과 감성의 경계에서 살아간다. 광범위한 관심사 탓에 에너지 소모량이 높아 가끔 낮에도 방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