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양유미 ⓐ누루커스
4년만이다. 일 때문에 테이스팅 할 때를 제외하고 자의적으로 장수막걸리를 마시는 건.
퇴근하고나서 막걸리를 마시는 일은 드물다. 막걸리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막걸리를 마실 때는 여간 해서 쉬는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술이 잘 만들어졌으면 잘 만들어진 대로, 못 만들어졌으면 못 만들어진 대로 편하지 않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편의점 냉장고 한 켠에 있는 장수막걸리가 요요히 빛을 뿜으며 내게 말을 건다. ‘나를 마셔봐, 나를 마셔봐.’ 홀린 듯이 장수막걸리 한 병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래, 마침 어제 먹다 남은 수육도 있으니까.
“장수막걸리?”
남편이 주안상에 올라온 장수막걸리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묻는다. 의외의 선택에 놀란 것 같다.
장수막걸리의 시장점유율이 서울 내에서는 80%에 달하는 걸 보면, 필사적으로 마시지 않아 온 셈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일의 연장선상으로 느껴지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다. 그리고 정말 말하기 부끄러운 두 번째 이유는, 젊은 날에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한 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그림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하필이면 그 학교 앞에 끝내주는 전집이 있었다. 수업을 마치면 모두들 그 전집으로 빨려들어가 굴전이며 장수막걸리를 산더미처럼 마셨다. 그런 짓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난 지금쯤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있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아직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인생의 한 시절은 장수막걸리에 마음을 의탁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무심코 골라잡은 장수막걸리 한 병이 이렇게 치기어린 젊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기폭제가 되다니. 아, 이래서 그 동안 피해왔던 것일까. 옛날 생각을 안주삼아 홀짝 홀짝.
무엇보다 맛있다. 너무 맛있다. 막걸리를 마실 때 일하는 느낌을 날려버릴 정도로, 직관적으로 맛있다. 굳이 이런 술을 마시며 무슨 무슨 향이 난다는 테이스팅 노트를 적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맛있다.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고는, ‘맛있다!’는 세 글자만 남기는 그런 종류의 맛있음이다.
실은 업자가 되면 어떤 술이 맛있다, 맛없다는 기준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지기도 한다. 좋은 ‘술’과 좋은 ‘상품’은 다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일이 되면 ‘상품’이 만들어지는 시스템과 산업의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게 된다. 주류 산업은 언뜻 미식과 브랜딩이라는 말랑한 말로 포장되어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설비’와 ‘유통’이라는 제조업의 근본적인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 장수막걸리가 ‘10일 유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타업체나 후발주자가 감히 따라할 수 없는 강력한 시스템을 갖췄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장수막걸리를 긴 시간 동안, 업계의 공룡이자 최강자로만 여겨왔을 뿐, ‘맛있는 술’을 만드는 곳으로 생각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이 한 병이 나를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는 소비자의 몸으로 바꿔놨다.
장수막걸리는 유통체계를 장악했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업계의 1인자로서 묵묵하게 맛까지 개선해오고 있었다.
이렇게 호들갑 떨면서 마실 수 있는 건, 어쩌면 내가 양조를 한 동안 쉬기로 결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홀짝. 한 모금에 과거를, 한 모금에 현재를, 한 모금에 미래를 생각한다. 장수막걸리에 마음을 의탁하는 인생의 시기, 제 2막이 열린 것만 같다. 앞으로 이 술과 함께 하는 3막, 4막도 있을 것 같다. 접근성 좋은 저렴한 술은 이렇게 마시는 사람의 한 시절을 깊이 파고든다. 업자이자 소비자로서 다층적으로 존경과 감사함이 느껴졌다.
장수막걸리여, 장수하여 주시옵소서.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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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양유미
가장 동시대적인 술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이쁜꽃의 디렉터.
그림 ⓒ양유미 ⓐ누루커스
4년만이다. 일 때문에 테이스팅 할 때를 제외하고 자의적으로 장수막걸리를 마시는 건.
퇴근하고나서 막걸리를 마시는 일은 드물다. 막걸리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막걸리를 마실 때는 여간 해서 쉬는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술이 잘 만들어졌으면 잘 만들어진 대로, 못 만들어졌으면 못 만들어진 대로 편하지 않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편의점 냉장고 한 켠에 있는 장수막걸리가 요요히 빛을 뿜으며 내게 말을 건다. ‘나를 마셔봐, 나를 마셔봐.’ 홀린 듯이 장수막걸리 한 병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래, 마침 어제 먹다 남은 수육도 있으니까.
“장수막걸리?”
남편이 주안상에 올라온 장수막걸리와 나를 번갈아 보면서 특유의 높은 목소리로 묻는다. 의외의 선택에 놀란 것 같다.
장수막걸리의 시장점유율이 서울 내에서는 80%에 달하는 걸 보면, 필사적으로 마시지 않아 온 셈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일의 연장선상으로 느껴지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다. 그리고 정말 말하기 부끄러운 두 번째 이유는, 젊은 날에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한 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그림 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하필이면 그 학교 앞에 끝내주는 전집이 있었다. 수업을 마치면 모두들 그 전집으로 빨려들어가 굴전이며 장수막걸리를 산더미처럼 마셨다. 그런 짓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난 지금쯤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있을 수도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아직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인생의 한 시절은 장수막걸리에 마음을 의탁하는 때가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무심코 골라잡은 장수막걸리 한 병이 이렇게 치기어린 젊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기폭제가 되다니. 아, 이래서 그 동안 피해왔던 것일까. 옛날 생각을 안주삼아 홀짝 홀짝.
무엇보다 맛있다. 너무 맛있다. 막걸리를 마실 때 일하는 느낌을 날려버릴 정도로, 직관적으로 맛있다. 굳이 이런 술을 마시며 무슨 무슨 향이 난다는 테이스팅 노트를 적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맛있다.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고는, ‘맛있다!’는 세 글자만 남기는 그런 종류의 맛있음이다.
실은 업자가 되면 어떤 술이 맛있다, 맛없다는 기준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지기도 한다. 좋은 ‘술’과 좋은 ‘상품’은 다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일이 되면 ‘상품’이 만들어지는 시스템과 산업의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게 된다. 주류 산업은 언뜻 미식과 브랜딩이라는 말랑한 말로 포장되어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설비’와 ‘유통’이라는 제조업의 근본적인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 장수막걸리가 ‘10일 유통’을 강조하는 이유는 타업체나 후발주자가 감히 따라할 수 없는 강력한 시스템을 갖췄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장수막걸리를 긴 시간 동안, 업계의 공룡이자 최강자로만 여겨왔을 뿐, ‘맛있는 술’을 만드는 곳으로 생각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이 한 병이 나를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는 소비자의 몸으로 바꿔놨다.
장수막걸리는 유통체계를 장악했다는 사실에 안주하지 않고, 업계의 1인자로서 묵묵하게 맛까지 개선해오고 있었다.
이렇게 호들갑 떨면서 마실 수 있는 건, 어쩌면 내가 양조를 한 동안 쉬기로 결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홀짝. 한 모금에 과거를, 한 모금에 현재를, 한 모금에 미래를 생각한다. 장수막걸리에 마음을 의탁하는 인생의 시기, 제 2막이 열린 것만 같다. 앞으로 이 술과 함께 하는 3막, 4막도 있을 것 같다. 접근성 좋은 저렴한 술은 이렇게 마시는 사람의 한 시절을 깊이 파고든다. 업자이자 소비자로서 다층적으로 존경과 감사함이 느껴졌다.
장수막걸리여, 장수하여 주시옵소서.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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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양유미
가장 동시대적인 술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이쁜꽃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