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유네스코도 인정한 한국의 술게임 문화 #1

누루커스
202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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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술은 곧 아드레날린이다. 이 땅의 사람들은 즐거우면 즐겁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주안상을 차렸다. 음주엔 가무가 빠지지 않았다. 춤과 노래를 할 수 없다면 다른 뭐라도 해야했다. 정적인 술자리는 뭔가 이상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술자리는 에너지를 뿜어낼 만한 요소가 있어야 완성된다.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라도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다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저 몸 안에 흐르는 흥 유전자를 달래고 고여 있는 흥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한 것이 필요하다.



술은 게임을 위한 연료일 뿐.


그러나 단순히 술잔을 들었다 놨다 반복하는 행위는 우리의 흥님을 만족시켜드릴 수 없었다. 고대시대부터 한반도에 살던 조상님들은 묘안을 떠올렸고, 술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축적된 고민들은 민족문화가 되었다. 

재밌게 놀기 위한 노력의 역사는 마침내 세계의 인정을 받게 되는데, 술게임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신라 포석정이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에 이른다. 비록 경주역사지구라는 큰 틀 안에 포함된 것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술게임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 가치를 다시 한 번 고찰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는 민족의 얼이 담긴 상징적 술게임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선조들의 빛나는 상상력을 엿보고, 현대인에게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유상곡수연

굽이치는(곡) 물(수) 위를 흐르는(유) 잔(상)이라는 뜻에 연희의 연자가 붙어 만들어진 놀이로, 플레이어들은 물가를 따라 앉고 흘러오는 술잔이 자신에게 닿기 전 즉석으로 시를 만들어 읊어야 하는 게임이다. 실패할 경우 벌칙은 3잔을 마시는 것이었다. 게임이 펼쳐지는 아레나는 바로 그 유명한 포석정이다. 포석정은 전복모양(포) 돌(석)이 있는 정자(정)라는 뜻으로 한국 사람이라면 굳이 설명 없이도 그 모습을 알고 있다.(정자는 아쉽게도 현재 남아있지 않다.)


가을날 포석정의 운치 ⓒgyeongju.go.kr


유상곡수연은 한중일 모두 즐겼던 놀이지만 포석정의 심오한 설계 미학과 만나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었다. 물길을 따라 술잔이 한바퀴 도는 시간은 약 10분 30초이며 참가자가 많을수록 사람 당 주어지는 시간은 짧아진다. 술잔이 이동하는 동안 기울어지거나 벽면에 닿지 않도록 수로의 깊이와 폭을 치밀하게 계산했다. 유속과 유향을 파악하는 유체역학이 이미 그 때부터 발달했던 것이다. 구불구불한 모양이 이제야 납득이 간다. 음주의 즐거움을 위해 얼마나 많은 학자와 기술이 동원되었을 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열정과 흥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포석정 구조


포석정의 쓰임에 대해선 다양한 이견이 있다. 제례를 위한 곳이라는 설도, 우수한 인재 발굴을 위해 순발력과 기지를 테스트하는 곳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술을 마시기 위해 조성된 곳이라는 점이다. 유상곡수연은 그곳을 무대로 이루어졌고 그렇게 한국 술게임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2019년 전주에서 재현된 유상곡수연 행사. 도대체 내 차례는 언제 오는가. ⓒfocusdaily


주령구

참신한 디자인이다. 술게임을 향한 정성이 느껴진다. ⓒ경주국립박물관


1975년 경주 안압지에서 발굴된 주령구는 1300여년전 만들어진 신라의 주사위다. 원본은 출토 당시 건조기에 넣고 말리다가 불에 타 사라졌지만 복원본을 통해 현재까지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14면으로 된 이 주사위는 각 면마다 벌칙이 쓰여 있는데 춤과 노래를 시키는 것은 기본이요, 다른 사람 코 두드리기, 간지러움 참기 등 다소 체통에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취기에 하는 행동은 타인을 심기를 불쾌하게 할 수 있어 곱게 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신라인들은 이를 인정하고 오히려 즐기는 방법을 선택했다.



주령구의 진짜 혁신은 휴대성이다. 포석정과 달리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술게임을 할 수 있다. 실제로는 귀족들만 즐겼다고 하지만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전국민에게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었다.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진정한 국민술게임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벌칙도 취향에 따라 마음껏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다. 14가지의 다양한 벌칙은 쉽게 지루해지는 걸 막고 술자리의 취지와 개성을 확실히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면들은 모양이 달라도 면적이 비슷해 승률조작을 방지할 수 있다. 수학적인 비례, 미학적인 구조 그리고 당대의 음주문화를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귀중한 보물이다. 주령구는 시대를 뛰어 넘어 진정한 술자리 정신과 술게임의 과학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경주인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주령구빵 ⓒgyeong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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