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배에도 막걸리를 허하라!

누루커스
2020-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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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스패로우와 럼주. 제 사진은 아닙니다 ⓒ Walt Disney Pictures


항해사 이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꽤나 독특한가보다. 3년 간 배를 탔다고 하면 만나는 사람 대부분은 호기심을 갖는다. 많은 질문들을 하곤 하는데 꼭 나오는 소재 중 하나가 술이다. 

배에서 마시는 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럼주 같은 소리는 하지 말자. 그건 피터팬의 후크선장이나 캐리비안의 해적인 잭 스패로우 같은 사람들이 마시는 거다.


배에선 술 값이 정말 싸다! 배는 국경을 넘어 활동하기 때문에 주류가 면세로 선적된다. 배에서는 맥주와 위스키의 경우 주세 72%와 부가세 10% 등을 고려하면 시중가의 절반도 안될 것이다. 

공항면세점은 유통 비용과 면세점의 판매수수료가 있기 때문에 체감 할 만큼 저렴하진 않다. 시중에선 수입맥주 4캔 만원이 싸다고 하지만 배에서 24캔 한 박스를 만원에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배는 술의 천국이다. (그런데 최근엔 사건사고 탓인지 안타깝게도(?) 음주를 금지하는 배들도 생겨나고 있다...)



국경을 오가는 컨테이너선


그런데...

배에는 막걸리가 없다. 한국술이 없다! 

배에선 긴 항해기간 탓에 식료품을 한 번에 대량으로 싣는다. 막걸리가 아무리 유통기한이 짧더라도 취급조차 안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좋은 막걸리는 유통기한이 최소 한 달 이상 가는데 말이다. 

간혹 한국에 정박했을 때 막걸리가 고픈 선원들을 위해 선적해 주는 경우가 있다. 물론 배에 올라오는 동시에 자취를 감춘다. 동공이 풀린 선원들이 허겁지겁 냉장고로 돌격해 사정없이 챙겨 방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막걸리에 한 맺힌 사람들 같았다.

나 역시 막걸리가 너무 먹고 싶었다. 식료품을 선적하는 날 대기하고 있다가 재빠르게 막걸리를 낚아채 방에 숨겼다. 상온에서 며칠을 방치해두고 마셨다가 심각한 복통을 앓기도 했다. 당시엔 생막걸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맥주나 위스키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외롭습니다. ⓒWalt Disney Pictures

 


아무튼 이건 분명히 수요가 있다는 증거다. 선상 생활은 외롭고 고되다. 그래서 술과 뗄레야 뗄 수가 없다. 그 옛날 대항해시대엔 물이 귀했을 뿐더러 오랜 항해기간에 쉽게 부패했기 때문에 상하지 않는 고도수 증류주를 마셨다. 하지만 이젠 물도 술도 풍족한 시대가 되었다. 이젠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한국 해운업계는 여러가지 악재가 겹쳐 불황이지만 여전히 세계 5위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그에 따른 선원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세계를 누비는 한국선원들은 그 자체로 문화외교관이다. 지구를 순회하며 다양한 외국인을 만나 술을 선물하고 받는다. 그들이 한국과 한국의 문화를 설명할 때 손에 초록병 소주 말고 고급진 한국술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선 일단 한국술을 마시는 문화가 우선되어야 한다. 질 좋은 막걸리부터 시작해보자. 그 다음 프리미엄 소주를 맛보자. 양주와는 또다른 세계가 열릴 것이다.

해운회사들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해기사는 국제신사라고들 하는데, 한국의 해기사가 마시는 술이 너무 서양의 신사를 닮아 있지는 않은지. N


추신: 어선은 해경이 음주단속을 하지만 상선은 회사가 엄격히 규제한다. 이 글은 선상 음주를 독려하는 의도가 아닌 음주문화를 바꿔보자는 취지이니 오해 없기를...





진병우

전통주소믈리에
전 항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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