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은 말했다. 낮술을 마실 때, 성공한 기분이 든다고.
아쉽게도 아직 괄목할만한 성취가 없어 성공한 기분까지는 모르겠지만, 낮술이 주는 해방감만큼은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상대적인 동물. 낮술 최고의 안주는 다름 아닌 타인의 성실이다. 얄궂게도 타인이 일할 때, ‘나는 놀지(롱)’하는 감각이 성공한 기분도 들게 만들고, 술잔을 기울이며 느껴지는 햇살도 바람도 더 맛들어지게 만든다. 모두들 낮에 술을 마신다면 굳이 ‘낮술’이라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당연하기에 밤술이라는 말은 없지 않는가. 금기를 슬쩍 넘어 내키는대로 굴어도, 피해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도 낮술의 깜찍한 점이다.
흔히들 낮술을 마시면 부모님도 못 알아본다고 했다.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낮술을 마셨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낮술을 마시며 우리는 서로 이렇게 말했다. “다행이다, 여기에 부모님 안계셔서”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의 나를 만난다면 귓가에 속삭여 주고 싶다 “신사답게 굴어, 젊은 친구”
한계를 몰랐던 젊은 날, 우리는 온갖 술들을 우리 몸에 퍼부었다. 어디가 선인지, 아니 선이라는게 있기는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은 것처럼. 해가 뉘엿뉘엿 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각자 전화기를 들고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울고 있었다. 낳아주셔서 고맙다라든지, 그동안 속 썩여서 미안했다든지, 아니아니 술 안 먹었다든지 하면서 불타는 효자가 되었다. 아무래도 술 먹는 내내, 알아보지 못할 부모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근거리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도, 낮술의 위력은 대단하니 모두들 주의 하시길.
철 없던 지난 날을 지나, 얼떨결에 엄마도 되고 사회인이 된 지금 낮술을 먹기란 요원하다. 신동엽이 했던 말의 깊이를 곱씹게 된다. 역시 한국 최고의 코미디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꾼에게 낮술이란 놓칠 수 없는 풍류이자, 주기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위업 같은 것.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기에 나는 나의 완벽한 낮술 모먼트를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하곤 한다. 어떻게 해야 낮술을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혹시 무슨 술을 먹어야 할 지부터 고민한다면, 그건 잘못된 질문이다. 낮술은 주종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낮술이라는 이벤트로 흘러 들어가는 맥락부터 설계가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진정한 낮술은 계획되어서는 안 된다. 계획된 낮술은 휴가이지, 낮술이 아니다. 낮술을 위해 하루를 미리 빼서는, 앞서 말했던 ‘나는 놀지(롱)’의 배덕감을 살릴 수가 없다. 낮술은 일상의 연속에서 갑자기 튀어오른 요철 같은 사건. 숨을 고르고 나의 일상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본다.
그래, 이거다! 상상 속에서 나는 식사를 겸한 미팅자리로 간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는 음식, 협력사 분이 내게 한 마디 한다 “저희 반주 조금 할까요?” 쿵쾅 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나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막걸리?”
술 잔을 기울이며 전보다는 조금 가깝게 마음을 맞대고, 우리 프로젝트의 장대한 미래를 그린다. 식사 자리가 끝나고 웅장해진 가슴을 안고 협력사 분과 악수를 뛰어넘어,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한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나는 마음 속으로 말한다.
‘그래, 오늘 샷다 내려’
연락처를 열어 같이 술을 마실 사람을 물색하면서 물 흐르듯이 낮술이라는 사건의 파도에 몸을 맡긴다.
시작이 반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미 낮술은 밤술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너무 즐겁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낮술 좀 마셨다고 샷다내리고 내리 술을 들이 붓는 건 역시 치기어린 젊은 날에나 가능했던 방만함인 것 같다. 지금의 나에게 허락된 건 낮술이 주는 약간의 고양감 정도. 그런 들뜬 기분과 뜨거워진 볼을 식히며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게 그 시절과 달라진 점이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그 순간을 기다린다.
사건발생! 사건발생!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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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양유미
가장 동시대적인 술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이쁜꽃의 디렉터.
신동엽은 말했다. 낮술을 마실 때, 성공한 기분이 든다고.
아쉽게도 아직 괄목할만한 성취가 없어 성공한 기분까지는 모르겠지만, 낮술이 주는 해방감만큼은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상대적인 동물. 낮술 최고의 안주는 다름 아닌 타인의 성실이다. 얄궂게도 타인이 일할 때, ‘나는 놀지(롱)’하는 감각이 성공한 기분도 들게 만들고, 술잔을 기울이며 느껴지는 햇살도 바람도 더 맛들어지게 만든다. 모두들 낮에 술을 마신다면 굳이 ‘낮술’이라는 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너무 당연하기에 밤술이라는 말은 없지 않는가. 금기를 슬쩍 넘어 내키는대로 굴어도, 피해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도 낮술의 깜찍한 점이다.
흔히들 낮술을 마시면 부모님도 못 알아본다고 했다.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낮술을 마셨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낮술을 마시며 우리는 서로 이렇게 말했다. “다행이다, 여기에 부모님 안계셔서” 타임머신을 타고 그 때의 나를 만난다면 귓가에 속삭여 주고 싶다 “신사답게 굴어, 젊은 친구”
한계를 몰랐던 젊은 날, 우리는 온갖 술들을 우리 몸에 퍼부었다. 어디가 선인지, 아니 선이라는게 있기는 있는지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은 것처럼. 해가 뉘엿뉘엿 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들 각자 전화기를 들고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울고 있었다. 낳아주셔서 고맙다라든지, 그동안 속 썩여서 미안했다든지, 아니아니 술 안 먹었다든지 하면서 불타는 효자가 되었다. 아무래도 술 먹는 내내, 알아보지 못할 부모님이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한 것이 기폭제가 되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근거리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도, 낮술의 위력은 대단하니 모두들 주의 하시길.
철 없던 지난 날을 지나, 얼떨결에 엄마도 되고 사회인이 된 지금 낮술을 먹기란 요원하다. 신동엽이 했던 말의 깊이를 곱씹게 된다. 역시 한국 최고의 코미디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꾼에게 낮술이란 놓칠 수 없는 풍류이자, 주기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위업 같은 것.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기에 나는 나의 완벽한 낮술 모먼트를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하곤 한다. 어떻게 해야 낮술을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혹시 무슨 술을 먹어야 할 지부터 고민한다면, 그건 잘못된 질문이다. 낮술은 주종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다. 낮술이라는 이벤트로 흘러 들어가는 맥락부터 설계가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진정한 낮술은 계획되어서는 안 된다. 계획된 낮술은 휴가이지, 낮술이 아니다. 낮술을 위해 하루를 미리 빼서는, 앞서 말했던 ‘나는 놀지(롱)’의 배덕감을 살릴 수가 없다. 낮술은 일상의 연속에서 갑자기 튀어오른 요철 같은 사건. 숨을 고르고 나의 일상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본다.
그래, 이거다! 상상 속에서 나는 식사를 겸한 미팅자리로 간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는 음식, 협력사 분이 내게 한 마디 한다 “저희 반주 조금 할까요?” 쿵쾅 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나는 태연하게 대답한다.
“막걸리?”
술 잔을 기울이며 전보다는 조금 가깝게 마음을 맞대고, 우리 프로젝트의 장대한 미래를 그린다. 식사 자리가 끝나고 웅장해진 가슴을 안고 협력사 분과 악수를 뛰어넘어,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한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나는 마음 속으로 말한다.
‘그래, 오늘 샷다 내려’
연락처를 열어 같이 술을 마실 사람을 물색하면서 물 흐르듯이 낮술이라는 사건의 파도에 몸을 맡긴다.
시작이 반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미 낮술은 밤술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너무 즐겁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낮술 좀 마셨다고 샷다내리고 내리 술을 들이 붓는 건 역시 치기어린 젊은 날에나 가능했던 방만함인 것 같다. 지금의 나에게 허락된 건 낮술이 주는 약간의 고양감 정도. 그런 들뜬 기분과 뜨거워진 볼을 식히며 엄마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게 그 시절과 달라진 점이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그 순간을 기다린다.
사건발생! 사건발생!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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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양유미
가장 동시대적인 술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이쁜꽃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