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건 아니다…’
요즘 집에서 밖으로 나오면 드는 생각이다. 더울 땐 덥게, 추울 땐 춥게 사는 것이 인간의 순리라 생각하며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이번 여름은 참 어렵다. 매일 한 두 시간씩 걷는 루틴도 무너졌다. 어제는 걷다가 더위를 먹었는지 하루 종일 정신이 혼미해 혼났다.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캐리어 에어컨의 그 캐리어 맞다.) 아저씨에게 노벨상을 줘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에, 자연스럽게 살기가 참 어려워졌다. 치솟는 기온에 냉방기기의 사용이 증가하고 온실가스로 인해 지구가 다시 뜨거워지는 악순환의 구조. 알면서도 에어컨을 끌 수가 없다.
특히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온열질환을 주의해야하니, 더위를 억지로 참지 마세요.
술꾼에게도 좋지 않은 계절이다. 술은 액체로 보이지만 사실은 뜨거운 불과도 같다. 술에 취한 채로 폭염 속을 걷는 일은 안팎으로 불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더위를 견디기 위해 말초 혈관이 늘어나 있어, 혈중 알코올 농도가 빠르게 올라간다고 한다. 게다가 술을 소변을 촉진하기까지 하니, 여러모로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땀까지 흘리면 탈수가 오기 쉽상이다.
에어컨 빵빵한 호프집에서 얼린 맥주잔에 신선한 생맥주가 담겨 나오더라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면 키야 소리가 절로 들어간다. 실제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먹는 술은 있어도, 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술은 없지 않은가. 혹시 무더위 땡볕 아래 야장 노지술로 이열치열하는 친구가 있다면 여러모로 걱정을 해줘야 할 터이다.
실은 요 근래 나의 모습을 보고 남편인 이과장의 걱정도 자라나고 있었다. 입맛 떨어진 아내를 본 적은 있어도(그마저도 별로 없었지만), 술맛이 떨어진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더웠던 여름 밤에 이과장이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작, 사부작.
부엌에서 얼음을 깨트리는 소리, 탄산수 병이 따지는 소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리 - 스탠리 텀블러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였다. 무심히 소파에 몸을 기울이고 있던 나는, 몸을 일으킬 기력은 없지만 귀만은 쫑긋해져 있었다. 조금 있다가 이과장이 내 손에 건넨 건, 다름 아닌 스탠리 텀블러에 담긴 하이볼 한 잔.
“이게 뭐야”
의아했다.
무엇보다 풍류를 즐기는 이과장은, 홈텐딩을 할 때면 있는 기물 없는 기물 다 꺼내 놓고 무슨 잔에 술을 만들지 한참 고민하는 자기 모습에 취하는 남자.
이과장 기준에서 하이볼이라면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이 투명하게 빛나는 게 맛 아니던가? 금빛 위스키가 빛에 반사되며 빛나야 제대로인 법인데, 이건 어쩐지 뽐새가 떨어지는 거 아닌가. 알쏭달쏭한 내 표정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과장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한다.
“미국에서 화재로 전소된 차량에서 다음 날 스탠리 텀블러가 멀쩡하게 발견됐었는데, 그 속에는 심지어 얼음까지 녹지 않았더래요. 이거라면 지금의 유미님도 괜찮을지 몰라.”
스탠리 텀블러를 잡았다. 차가운 잔에 맺힌 이슬의 촉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퍽 생경하지만 이 과장의 정성이 가상해 한 모금 마셔보았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했던 수준의 냉기..! 아무리 잔을 얼리고, 얼음을 때려 넣은 하이볼도 이 정도로 차기는 어렵다.
한 모금, 두 모금, 이게 웬 걸? 그동안 여름이 무서워 마시지 못했던 술맛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그렇게 마지막 한 모금까지, 끝까지 시원하지만, 끝까지 일관적인 농도의 완벽한 하이볼! 이건 하이볼의 이데아 아닌가! 텀블러 덕분에 온도가 유지된 덕이었다. 술의 향이 가득하면서도, 얼음이 다 녹아 맛이 밍밍해지지 않았다. 이과장이 왜 이렇게 자신만만해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건 바로 새로운 방식의 풍류가 아닐까? 환경을 생각하며 에너지를 절감하는 ‘친환경 풍류’라 불러도 괜찮을 정도였다.
이제 스탠리 텀블러는 그저 강한 보냉기능을 자랑하는 캠핑용 컵이 아니다. 이글거리는 여름에도 시원한 술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데 도움을 주는 친환경 도구다. 잔을 얼리거나 얼음이 균일하게 느리게 녹도록 모양을 잡아 수고롭게 깎아내며 낭비하는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어 자연을 덜 해친다. 게다가 바에서 제공하는 값비싼 컵보다 세척도 수월하고, 폴리싱하는 노력도 줄어드니 “스탠리 하이볼”이라는 이름으로 트렌디한 바의 친환경 메뉴로 자리 잡아도 되지 않을까! - 는 조금 비약이겠습니다만, 한 번 해보세요. 정말로 그럴싸합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름밤마다 이과장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또?” 귀찮은 척 내심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과장은 스윽 스탠리 텀블러를 꺼낸다. 텀블러에 담긴 술이라니, 어쩐지 바보 같기도 하지만 나의 하이볼 맛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덕분에 무더운 여름도 조금은 더 견딜 만해졌다. 게다가 매일 한 잔씩 마실 때마다 지구를 조금씩 덜 더운 곳으로 만드는 기분이 들어, 술 한잔에도 책임감이 더해졌다.
(사실은 아예 마시지 않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겠습니다마는) 정말이지 이과장스러운 풍류다.
한여름, 무더운 날씨와 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는 법. 그 법을 나는 이과장 덕분에 깨달았다. 이렇게 우리는 올여름을 스탠리 텀블러와 함께 버티고 있다. 가을이 오면 이 텀블러는 다시 어디론가 숨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이 작은 은색의 동지가 여름 밤에 함께 해줄 것이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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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양유미
가장 동시대적인 술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이쁜꽃의 디렉터.
‘아 이건 아니다…’
요즘 집에서 밖으로 나오면 드는 생각이다. 더울 땐 덥게, 추울 땐 춥게 사는 것이 인간의 순리라 생각하며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이번 여름은 참 어렵다. 매일 한 두 시간씩 걷는 루틴도 무너졌다. 어제는 걷다가 더위를 먹었는지 하루 종일 정신이 혼미해 혼났다. 에어컨을 발명한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캐리어 에어컨의 그 캐리어 맞다.) 아저씨에게 노벨상을 줘야 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에, 자연스럽게 살기가 참 어려워졌다. 치솟는 기온에 냉방기기의 사용이 증가하고 온실가스로 인해 지구가 다시 뜨거워지는 악순환의 구조. 알면서도 에어컨을 끌 수가 없다.
특히 기저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온열질환을 주의해야하니, 더위를 억지로 참지 마세요.
술꾼에게도 좋지 않은 계절이다. 술은 액체로 보이지만 사실은 뜨거운 불과도 같다. 술에 취한 채로 폭염 속을 걷는 일은 안팎으로 불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더위를 견디기 위해 말초 혈관이 늘어나 있어, 혈중 알코올 농도가 빠르게 올라간다고 한다. 게다가 술을 소변을 촉진하기까지 하니, 여러모로 수분이 부족한 상태에서 땀까지 흘리면 탈수가 오기 쉽상이다.
에어컨 빵빵한 호프집에서 얼린 맥주잔에 신선한 생맥주가 담겨 나오더라도, 집에 돌아갈 생각을 하면 키야 소리가 절로 들어간다. 실제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먹는 술은 있어도, 더위를 이겨내기 위한 술은 없지 않은가. 혹시 무더위 땡볕 아래 야장 노지술로 이열치열하는 친구가 있다면 여러모로 걱정을 해줘야 할 터이다.
실은 요 근래 나의 모습을 보고 남편인 이과장의 걱정도 자라나고 있었다. 입맛 떨어진 아내를 본 적은 있어도(그마저도 별로 없었지만), 술맛이 떨어진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더웠던 여름 밤에 이과장이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작, 사부작.
부엌에서 얼음을 깨트리는 소리, 탄산수 병이 따지는 소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소리 - 스탠리 텀블러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였다. 무심히 소파에 몸을 기울이고 있던 나는, 몸을 일으킬 기력은 없지만 귀만은 쫑긋해져 있었다. 조금 있다가 이과장이 내 손에 건넨 건, 다름 아닌 스탠리 텀블러에 담긴 하이볼 한 잔.
“이게 뭐야”
의아했다.
무엇보다 풍류를 즐기는 이과장은, 홈텐딩을 할 때면 있는 기물 없는 기물 다 꺼내 놓고 무슨 잔에 술을 만들지 한참 고민하는 자기 모습에 취하는 남자.
이과장 기준에서 하이볼이라면 투명한 유리잔에 얼음이 투명하게 빛나는 게 맛 아니던가? 금빛 위스키가 빛에 반사되며 빛나야 제대로인 법인데, 이건 어쩐지 뽐새가 떨어지는 거 아닌가. 알쏭달쏭한 내 표정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과장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한다.
“미국에서 화재로 전소된 차량에서 다음 날 스탠리 텀블러가 멀쩡하게 발견됐었는데, 그 속에는 심지어 얼음까지 녹지 않았더래요. 이거라면 지금의 유미님도 괜찮을지 몰라.”
스탠리 텀블러를 잡았다. 차가운 잔에 맺힌 이슬의 촉감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퍽 생경하지만 이 과장의 정성이 가상해 한 모금 마셔보았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했던 수준의 냉기..! 아무리 잔을 얼리고, 얼음을 때려 넣은 하이볼도 이 정도로 차기는 어렵다.
한 모금, 두 모금, 이게 웬 걸? 그동안 여름이 무서워 마시지 못했던 술맛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그렇게 마지막 한 모금까지, 끝까지 시원하지만, 끝까지 일관적인 농도의 완벽한 하이볼! 이건 하이볼의 이데아 아닌가! 텀블러 덕분에 온도가 유지된 덕이었다. 술의 향이 가득하면서도, 얼음이 다 녹아 맛이 밍밍해지지 않았다. 이과장이 왜 이렇게 자신만만해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건 바로 새로운 방식의 풍류가 아닐까? 환경을 생각하며 에너지를 절감하는 ‘친환경 풍류’라 불러도 괜찮을 정도였다.
이제 스탠리 텀블러는 그저 강한 보냉기능을 자랑하는 캠핑용 컵이 아니다. 이글거리는 여름에도 시원한 술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데 도움을 주는 친환경 도구다. 잔을 얼리거나 얼음이 균일하게 느리게 녹도록 모양을 잡아 수고롭게 깎아내며 낭비하는 에너지를 절감할 수 있어 자연을 덜 해친다. 게다가 바에서 제공하는 값비싼 컵보다 세척도 수월하고, 폴리싱하는 노력도 줄어드니 “스탠리 하이볼”이라는 이름으로 트렌디한 바의 친환경 메뉴로 자리 잡아도 되지 않을까! - 는 조금 비약이겠습니다만, 한 번 해보세요. 정말로 그럴싸합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름밤마다 이과장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또?” 귀찮은 척 내심 뿌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과장은 스윽 스탠리 텀블러를 꺼낸다. 텀블러에 담긴 술이라니, 어쩐지 바보 같기도 하지만 나의 하이볼 맛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덕분에 무더운 여름도 조금은 더 견딜 만해졌다. 게다가 매일 한 잔씩 마실 때마다 지구를 조금씩 덜 더운 곳으로 만드는 기분이 들어, 술 한잔에도 책임감이 더해졌다.
(사실은 아예 마시지 않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겠습니다마는) 정말이지 이과장스러운 풍류다.
한여름, 무더운 날씨와 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내는 법. 그 법을 나는 이과장 덕분에 깨달았다. 이렇게 우리는 올여름을 스탠리 텀블러와 함께 버티고 있다. 가을이 오면 이 텀블러는 다시 어디론가 숨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이 작은 은색의 동지가 여름 밤에 함께 해줄 것이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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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양유미
가장 동시대적인 술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이쁜꽃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