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는 두 번째 잡지사에서 일할 때 협력사 직원으로 만났다가 내가 프리랜서가 된 후 본격적으로 함께 일하게 된 사이다. 둘이서 일본 출장을 같이 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서로 취향은 달랐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한 온도가 비슷해서 쿵짝이 잘 맞았다. 호텔에서 밤 늦도록 이야기 나누는 날이 많아졌고, 어느새 속 깊은 고민도 털어놓게 되었다.
Y가 퇴사한 후에도 종종 연락하곤 했는데 대화거리가 된 것은 주로 ‘수제맥주’였다. 수제맥주에 먼저 관심을 가진 건 Y였지만 그 이후 나도 수제맥주를 찾아 마시기 시작했고, 나의 수제맥주 탐닉은 Y가 깜짝 놀랄 정도로 급물살을 탔다. 나중에는 도리어 Y가 요즘 괜찮은 수제맥주 뭐 없냐고 나에게 물어볼 정도가 되었다. Y가 중국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는 홍콩에서 만나 펍크롤링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날도 Y가 최근 일본 여행을 다녀왔는데 홋카이도 후라노에서 생산되는 괜찮은 수제맥주를 발견했으니 나중에라도 마셔보라며 링크를 보내왔다. 여기에 화답하듯 나는 전주에 궁금한 수제맥주 집이 있다며 알려줬다.
“같이 가실래요, 전주?”
Y의 제안에 순간 당황했지만 생각해보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Y와의 1박 2일 전주 여행이 갑작스럽게 정해졌다. 그리고 Y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 수제맥주를 좋아하는 직원 두 명도 같이 가도 괜찮겠냐고 물어왔고, 그렇게 ‘전주 수제맥주 4인팟’이 결성되었다. 날짜를 잡고 숙소를 예약하고 각자 기차표와 항공권을 예매하고 디데이에 전주역에서 만났다.
전주는 제주로 오기 전까지 가장 자주 여행하던 도시 중 하나다. 지금처럼 ‘뜨기’ 전의 전주가 너무 사랑스러웠기에 관광객이 몰리면서 변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는데, 거의 10년 만에 다시 간 전주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어 예전과는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주비빔밥을 먹고 오목대를 오르고 전주한옥 마을을 산책하고 작은 동네 책방을 가고 로스터리 카페에서 커피 한 잔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수제맥주 집으로 향했다.
‘노매딕 브루잉 컴퍼니’는 미국인 브루마스터가 운영하는 곳이다. 홉의 개성을 한껏 즐길 수 있는‘아메리칸 IPA’와 부담스럽지 않은 신 맛의 ‘사워에일’, 쌉싸래하고 고소한 풍미가 매력적인 ‘스타우트’ 등을 즐길 수 있다. 갑자기 오븐이 고장 나는 바람에 이 집 맥주와 찰떡궁합이라는 피자를 못 먹은 것은 아쉬웠지만, 그 덕에 배가 빨리 차지 않아 맥주를 종류별로 거의 다 맛볼 수 있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데는 오히려 좋았다. 혼자만 취기가 올라서 마지막 맥주 주문은 포기했지만 말이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눈이 떠졌다. 속이 쓰린 정도는 아니었지만 머리가 살짝 알딸딸했다. 혼자 숙소를 빠져 나와 남부시장으로 향했다. 전주에 오면 꼭 가는 곳이 있다. 남부시장 현대옥이다. 부산 돼지국밥처럼 저마다 최애로 꼽는 전주 콩나물국밥 집이 있을 텐데, 나에게는 현대옥 남부시장 본점이 그렇다. 테이블 자리도 있지만 꼭 주방 카운터 자리에 앉는다.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아주머니들이 콩나물국밥에 들어가는 파와 마늘, 청양고추를 커다란 나무 도마에서 ‘타다다’ 써는 것을 바라보며 ‘푹푹’ 떠 먹는 국밥은 어쩐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콩나물국밥과 함께 ‘모주’를 주문했다. 모주는 술을 거르고 남은 재강에 물을 타서 걸러낸 탁주다. 즉, 모주는 기본적으로 막걸리보다 연하고 맛이 덜하다. 그래서 전주에서 모주를 만들 때 생강, 대추, 계피 등 첨가물을 넣어 맛과 향을 보강하며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전주 모주를 막걸리로 만든다. 한번 끓이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1%미만인 논알코올이다.
그렇게 전주 여행을 다녔으면서 모주는 처음이다. 알코올이 휘발된 술은 아예 쳐다 보지도 않던 시절이 있었다.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한입 그득 오물오물 먹은 다음 모주를 벌컥 들이켰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렸다. 간마늘이 듬뿍 들어가 칼칼하고 자극적인 콩나물국밥과 달착지근하고 향긋한 모주는 극강의 ‘맵칼달달’ 조합이었다. 이제서야 이 맛을 알았다는 게 억울할 정도였다. 술을 잘 못 마시게 된 후 한없이 위축될 것만 같았는데, 도리어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무슨 일이든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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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이정선
20대는 잡지를 만들며 보냈고, 30대는 여행 콘텐츠를 만들며 보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지만 잘하는 일은 의미를 발견하고 엮어내는 기획과 설계라고 생각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한 삶을 추구하며 제주에서 살고 있다.
Y는 두 번째 잡지사에서 일할 때 협력사 직원으로 만났다가 내가 프리랜서가 된 후 본격적으로 함께 일하게 된 사이다. 둘이서 일본 출장을 같이 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서로 취향은 달랐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한 온도가 비슷해서 쿵짝이 잘 맞았다. 호텔에서 밤 늦도록 이야기 나누는 날이 많아졌고, 어느새 속 깊은 고민도 털어놓게 되었다.
Y가 퇴사한 후에도 종종 연락하곤 했는데 대화거리가 된 것은 주로 ‘수제맥주’였다. 수제맥주에 먼저 관심을 가진 건 Y였지만 그 이후 나도 수제맥주를 찾아 마시기 시작했고, 나의 수제맥주 탐닉은 Y가 깜짝 놀랄 정도로 급물살을 탔다. 나중에는 도리어 Y가 요즘 괜찮은 수제맥주 뭐 없냐고 나에게 물어볼 정도가 되었다. Y가 중국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는 홍콩에서 만나 펍크롤링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날도 Y가 최근 일본 여행을 다녀왔는데 홋카이도 후라노에서 생산되는 괜찮은 수제맥주를 발견했으니 나중에라도 마셔보라며 링크를 보내왔다. 여기에 화답하듯 나는 전주에 궁금한 수제맥주 집이 있다며 알려줬다.
“같이 가실래요, 전주?”
Y의 제안에 순간 당황했지만 생각해보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Y와의 1박 2일 전주 여행이 갑작스럽게 정해졌다. 그리고 Y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 수제맥주를 좋아하는 직원 두 명도 같이 가도 괜찮겠냐고 물어왔고, 그렇게 ‘전주 수제맥주 4인팟’이 결성되었다. 날짜를 잡고 숙소를 예약하고 각자 기차표와 항공권을 예매하고 디데이에 전주역에서 만났다.
전주는 제주로 오기 전까지 가장 자주 여행하던 도시 중 하나다. 지금처럼 ‘뜨기’ 전의 전주가 너무 사랑스러웠기에 관광객이 몰리면서 변해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는데, 거의 10년 만에 다시 간 전주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어 예전과는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주비빔밥을 먹고 오목대를 오르고 전주한옥 마을을 산책하고 작은 동네 책방을 가고 로스터리 카페에서 커피 한 잔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수제맥주 집으로 향했다.
‘노매딕 브루잉 컴퍼니’는 미국인 브루마스터가 운영하는 곳이다. 홉의 개성을 한껏 즐길 수 있는‘아메리칸 IPA’와 부담스럽지 않은 신 맛의 ‘사워에일’, 쌉싸래하고 고소한 풍미가 매력적인 ‘스타우트’ 등을 즐길 수 있다. 갑자기 오븐이 고장 나는 바람에 이 집 맥주와 찰떡궁합이라는 피자를 못 먹은 것은 아쉬웠지만, 그 덕에 배가 빨리 차지 않아 맥주를 종류별로 거의 다 맛볼 수 있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는 데는 오히려 좋았다. 혼자만 취기가 올라서 마지막 맥주 주문은 포기했지만 말이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눈이 떠졌다. 속이 쓰린 정도는 아니었지만 머리가 살짝 알딸딸했다. 혼자 숙소를 빠져 나와 남부시장으로 향했다. 전주에 오면 꼭 가는 곳이 있다. 남부시장 현대옥이다. 부산 돼지국밥처럼 저마다 최애로 꼽는 전주 콩나물국밥 집이 있을 텐데, 나에게는 현대옥 남부시장 본점이 그렇다. 테이블 자리도 있지만 꼭 주방 카운터 자리에 앉는다.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아주머니들이 콩나물국밥에 들어가는 파와 마늘, 청양고추를 커다란 나무 도마에서 ‘타다다’ 써는 것을 바라보며 ‘푹푹’ 떠 먹는 국밥은 어쩐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콩나물국밥과 함께 ‘모주’를 주문했다. 모주는 술을 거르고 남은 재강에 물을 타서 걸러낸 탁주다. 즉, 모주는 기본적으로 막걸리보다 연하고 맛이 덜하다. 그래서 전주에서 모주를 만들 때 생강, 대추, 계피 등 첨가물을 넣어 맛과 향을 보강하며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전주 모주를 막걸리로 만든다. 한번 끓이기 때문에 알코올 도수가 1%미만인 논알코올이다.
그렇게 전주 여행을 다녔으면서 모주는 처음이다. 알코올이 휘발된 술은 아예 쳐다 보지도 않던 시절이 있었다.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한입 그득 오물오물 먹은 다음 모주를 벌컥 들이켰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 어울렸다. 간마늘이 듬뿍 들어가 칼칼하고 자극적인 콩나물국밥과 달착지근하고 향긋한 모주는 극강의 ‘맵칼달달’ 조합이었다. 이제서야 이 맛을 알았다는 게 억울할 정도였다. 술을 잘 못 마시게 된 후 한없이 위축될 것만 같았는데, 도리어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무슨 일이든 나쁘기만 한 것은 없다.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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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이정선
20대는 잡지를 만들며 보냈고, 30대는 여행 콘텐츠를 만들며 보냈다. 글도 쓰고 사진도 찍지만 잘하는 일은 의미를 발견하고 엮어내는 기획과 설계라고 생각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한 삶을 추구하며 제주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