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날 아침은 건강한 식사로 시작된다. 정성스러운 음식 덕분에 하루의 에너지가 충만해졌다. 이제 양조장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에 앞서 엄숙한 전통 예식을 치러야 했다. 자연의 영향을 받는 발효의 특성상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양조장 어딘가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양조 과정마다 신의 조율이 미친다고 생각했고, 문턱을 넘는 것은 곧 신의 공간에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술에 대해 경건함, 겸손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날도 인근의 신사에서 신관이 직접 방문해 의식을 시작했다. 기도의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안녕과 기원을 비는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kurabitostay
내부에 들어갈 땐 향이 나는 그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준비된 가운을 입고, 비누 없이 손을 씻고, 소독했다. 양조장 내부를 둘러보자 325년이라는 역사를 짐작케하는 흔적들이 사방에 남아 있었다. 150년 묵은 목조건물의 검은 서까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수 백 년 전 그려진 양조 과정 도식까지. 그 날들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 호흡하는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덧술용 밥을 찌고, 고두밥을 넓은 공간으로 옮겨 식히는 임무가 주어졌다. 묵직한 나무 통에 밥을 넣고 어깨에 얹자 고소한 쌀 내음이 피부로,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고두밥을 한 줌 덜어 내어 양손바닥으로 꾹 눌러 찰기를 확인하는데, 쌀의 품종이 달라서인지 우리 술을 만들 때의 느낌, 향, 맛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미 사케의 향이 난다고나 할까.
밥을 식히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로비(?)로 자리를 옮겼다. 고대하던 사케테이스팅 시간이었다. 아직 아침인데다 온도가 낮은 양조장에서 서늘한 기운을 한참 쐬고 나오니 테이블 위에 놓인 술이 너무나 반가웠다. 그곳에서 생산한 혼죠조, 다이긴죠, 준마이다이긴죠에 대한 설명을 차례로 듣고 한 모금씩 입에 담자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사케라면 단순히 깔끔한 맛이라고 얼버무리던 과거가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점심은 양조장과 제휴를 맺은 로컬 식당 중 한 곳을 골라 미리 주문을 해두면 가는 동안 준비를 해 좀 더 빠르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지방 소멸과 인구 절벽이 현실임을 보여주듯 마을 거리엔 낮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위기 앞에서 지역 상권은 관광객을 순환시키고, 관광객에게 로컬을 경험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았다. 덕분에 마을을 구석구석 살피며 호젓한 풍경과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오전에 테이스팅을 한 탓인지 몇몇은 식사 후 숙소에서 꿀 같은 낮잠을 청했다. 양조장에 잠자리가 있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마시고 먹고 바로 자는 이 호사. 몸이 녹아내려 술이 될 것만 같았다.
누룩용 쌀을 씻는 것으로 오후 일정이 시작되었다. 눅눅해진 몸을 이끌고 다시 양조장으로 이동했다. 도정된 쌀을 세미용 틀에 넣고 2인 1조로 쌀을 씻었다. 한 명은 계속해서 쌀을 물 속에서 휘젓고 다른 한 명은 초단위로 맞춰진 시간에 따라 틀을 움직여 주는 식이었다. 씻은 쌀은 깨끗한 물에 담궈 불려주고 정확한 시간이 지나자 물기를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굳이 이렇게 엄격하게 쌀을 씻을 필요가 있나 의아했는데 잠시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고작 몇 분 차이가 나지 않은 두 개의 틀에서 쌀을 꺼내 비교해 보니 물을 머금은 정도에 따라 쌀의 상태가 달라져 있던 것이다. 그 디테일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그 미세한 차이를 위해 연구했을 세월에 경외감을 느꼈다.
ⓒkurabitostay
다음 과정은 미리 만들어진 밑술에 오전에 식혀두었던 고두밥을 덧술하는 작업이었다. 수 십 킬로그램이나 하는 고두밥을 넣고 밑술과 잘 섞이도록 휘젓는 일은 보통 고된 일이 아니었다. 기다란 나무 누르개로 뻑뻑한 고두밥을 힘껏 눌렀다가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누룩을 끌어올려 뒤섞어 주는 것이 정직한 요령(?)이었다. 이 작업을 몇 차례 반복하자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담당자는 최적의 발효 온도를 위해 며칠 간 밤낮으로 꾸준히 온도를 체크한다며 작은 글씨로 빼곡한 온도 점검표를 보여주었다.
둘째날 일정은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밀도 높은 일정 덕분인지(틈틈이 마신 술 때문인지) 몸이 나른했다. 그래서 식당에 가는 대신 로컬 마트에서 조리된 음식을 사와 즐기기로 했다. 일본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마트표 도시락은 술안주에도 제격이라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론 식당의 밥값보다 지출이 더 많았지만 여행의 묘미라 생각하니 위안이 되었다.
마트에서 돌아와 테이블에 음식을 늘어놓고 있는 찰나 다른 멤버들도 속속들이 숙소로 돌아왔다. 다들 마음이 비슷했는지 한 손엔 마트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렇게 삼삼오오 둘러 앉아 어제보다 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역시 일본 분들은 우리 손에는 미처 닿지 않았던 현지 느낌 가득한 음식을 가져왔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일본 음식을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난생 처음 느낀 맛들에 새삼 혓바닥이 겸손해졌다. 그건 마치 김치 한 조각에 한국을 파악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았다.
이 자리에서 의외의 미각 논쟁도 있었는데, 밥 위에 올려진 단 콩이 이상한 것이냐 아니냐하는 매우 심각한 사안을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일본 측에선 단 맛의 콩과 쌀의 담백함은 조화롭지 않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한국 측 패널인 나는 팥죽을 예로 들며 한국엔 단 맛이 강한 콩죽에 쌀로 만든 떡을 넣어 먹는 음식도 있다며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반론했다. 결론은
호오.. 소오데스네..
국경을 초월한 웃음이 한바탕 지나가고, 이야기는 TV드라마로, 연예인으로, 술 맛으로 그칠 줄 모르고 이어져 나갔다. 창 밖의 애매한 추위는 어느새 어둠 속으로 달아나 버렸고, 별이 가득한 밤하늘은 선명하게 우릴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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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abitostay
https://kurabitostay.c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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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진병우
이성과 감성의 경계에서 살아간다. 광범위한 관심사 탓에 에너지 소모량이 높아 가끔 낮에도 방전된다.
둘째 날 아침은 건강한 식사로 시작된다. 정성스러운 음식 덕분에 하루의 에너지가 충만해졌다. 이제 양조장에서의 본격적인 활동에 앞서 엄숙한 전통 예식을 치러야 했다. 자연의 영향을 받는 발효의 특성상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양조장 어딘가 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양조 과정마다 신의 조율이 미친다고 생각했고, 문턱을 넘는 것은 곧 신의 공간에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술에 대해 경건함, 겸손함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 날도 인근의 신사에서 신관이 직접 방문해 의식을 시작했다. 기도의 내용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안녕과 기원을 비는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kurabitostay
내부에 들어갈 땐 향이 나는 그 어떤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준비된 가운을 입고, 비누 없이 손을 씻고, 소독했다. 양조장 내부를 둘러보자 325년이라는 역사를 짐작케하는 흔적들이 사방에 남아 있었다. 150년 묵은 목조건물의 검은 서까래,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수 백 년 전 그려진 양조 과정 도식까지. 그 날들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 호흡하는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덧술용 밥을 찌고, 고두밥을 넓은 공간으로 옮겨 식히는 임무가 주어졌다. 묵직한 나무 통에 밥을 넣고 어깨에 얹자 고소한 쌀 내음이 피부로,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고두밥을 한 줌 덜어 내어 양손바닥으로 꾹 눌러 찰기를 확인하는데, 쌀의 품종이 달라서인지 우리 술을 만들 때의 느낌, 향, 맛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미 사케의 향이 난다고나 할까.
밥을 식히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로비(?)로 자리를 옮겼다. 고대하던 사케테이스팅 시간이었다. 아직 아침인데다 온도가 낮은 양조장에서 서늘한 기운을 한참 쐬고 나오니 테이블 위에 놓인 술이 너무나 반가웠다. 그곳에서 생산한 혼죠조, 다이긴죠, 준마이다이긴죠에 대한 설명을 차례로 듣고 한 모금씩 입에 담자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사케라면 단순히 깔끔한 맛이라고 얼버무리던 과거가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점심은 양조장과 제휴를 맺은 로컬 식당 중 한 곳을 골라 미리 주문을 해두면 가는 동안 준비를 해 좀 더 빠르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지방 소멸과 인구 절벽이 현실임을 보여주듯 마을 거리엔 낮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위기 앞에서 지역 상권은 관광객을 순환시키고, 관광객에게 로컬을 경험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았다. 덕분에 마을을 구석구석 살피며 호젓한 풍경과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오전에 테이스팅을 한 탓인지 몇몇은 식사 후 숙소에서 꿀 같은 낮잠을 청했다. 양조장에 잠자리가 있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마시고 먹고 바로 자는 이 호사. 몸이 녹아내려 술이 될 것만 같았다.
누룩용 쌀을 씻는 것으로 오후 일정이 시작되었다. 눅눅해진 몸을 이끌고 다시 양조장으로 이동했다. 도정된 쌀을 세미용 틀에 넣고 2인 1조로 쌀을 씻었다. 한 명은 계속해서 쌀을 물 속에서 휘젓고 다른 한 명은 초단위로 맞춰진 시간에 따라 틀을 움직여 주는 식이었다. 씻은 쌀은 깨끗한 물에 담궈 불려주고 정확한 시간이 지나자 물기를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굳이 이렇게 엄격하게 쌀을 씻을 필요가 있나 의아했는데 잠시 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고작 몇 분 차이가 나지 않은 두 개의 틀에서 쌀을 꺼내 비교해 보니 물을 머금은 정도에 따라 쌀의 상태가 달라져 있던 것이다. 그 디테일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그 미세한 차이를 위해 연구했을 세월에 경외감을 느꼈다.
ⓒkurabitostay
다음 과정은 미리 만들어진 밑술에 오전에 식혀두었던 고두밥을 덧술하는 작업이었다. 수 십 킬로그램이나 하는 고두밥을 넣고 밑술과 잘 섞이도록 휘젓는 일은 보통 고된 일이 아니었다. 기다란 나무 누르개로 뻑뻑한 고두밥을 힘껏 눌렀다가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 누룩을 끌어올려 뒤섞어 주는 것이 정직한 요령(?)이었다. 이 작업을 몇 차례 반복하자 온도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담당자는 최적의 발효 온도를 위해 며칠 간 밤낮으로 꾸준히 온도를 체크한다며 작은 글씨로 빼곡한 온도 점검표를 보여주었다.
둘째날 일정은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밀도 높은 일정 덕분인지(틈틈이 마신 술 때문인지) 몸이 나른했다. 그래서 식당에 가는 대신 로컬 마트에서 조리된 음식을 사와 즐기기로 했다. 일본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마트표 도시락은 술안주에도 제격이라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론 식당의 밥값보다 지출이 더 많았지만 여행의 묘미라 생각하니 위안이 되었다.
마트에서 돌아와 테이블에 음식을 늘어놓고 있는 찰나 다른 멤버들도 속속들이 숙소로 돌아왔다. 다들 마음이 비슷했는지 한 손엔 마트 봉지가 들려 있었다. 그렇게 삼삼오오 둘러 앉아 어제보다 더 큰 잔치가 벌어졌다. 역시 일본 분들은 우리 손에는 미처 닿지 않았던 현지 느낌 가득한 음식을 가져왔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일본 음식을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난생 처음 느낀 맛들에 새삼 혓바닥이 겸손해졌다. 그건 마치 김치 한 조각에 한국을 파악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았다.
이 자리에서 의외의 미각 논쟁도 있었는데, 밥 위에 올려진 단 콩이 이상한 것이냐 아니냐하는 매우 심각한 사안을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일본 측에선 단 맛의 콩과 쌀의 담백함은 조화롭지 않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한국 측 패널인 나는 팥죽을 예로 들며 한국엔 단 맛이 강한 콩죽에 쌀로 만든 떡을 넣어 먹는 음식도 있다며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반론했다. 결론은
호오.. 소오데스네..
국경을 초월한 웃음이 한바탕 지나가고, 이야기는 TV드라마로, 연예인으로, 술 맛으로 그칠 줄 모르고 이어져 나갔다. 창 밖의 애매한 추위는 어느새 어둠 속으로 달아나 버렸고, 별이 가득한 밤하늘은 선명하게 우릴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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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urabitostay.c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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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진병우
이성과 감성의 경계에서 살아간다. 광범위한 관심사 탓에 에너지 소모량이 높아 가끔 낮에도 방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