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양유미
‘아, 뭔가 잘못됐다.’ 시댁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알 수 없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식사하는 동안 처음 느껴보는 강도의 두통이 오더니 갑자기 토할 것 같기도 하고, 배탈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진퇴양난. 일단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15분이 지나도록 어떤 해결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식은땀이 나더니, 땀으로 몸이 흠뻑 젖었다. 가랑비를 맞은 것처럼.
신이시여, 왜 하필 시댁에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시부모님께서 정성껏 차려주신 밥을 먹고 나서, 이렇게 되다니 혹여나 당신 탓을 하실까 걱정됐다. 일단 나가서 말씀드렸다.
“좀 급하게 먹었나봐요. 잠시만 더 화장실에 있어볼게요.”
5분 후 먹은 것을 전부 게워냈다. 즐거운 저녁식사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폐인이 되어 화장실에서 돌아온 며느리를 보고 시부모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에구, 미안해라. 너무 긴장하고 있었나보구나.”
시부모님들은 좋은 분들이시다. 나는 솔직하게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수 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전혀 반대에요. 너무 긴장하지 않고, 맛있어서 허겁지겁 먹다보니 그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전형적인 급체였다. 시어머님께서는 3년 묵은 껄쭉한 매실엑기스를, 시아버님께서는 인산죽염을 챙겨주셨다. 돌아가는 길에 매실 엑기스를 천천히 마시고, 인산죽염은 씹어먹지말고 입에서 녹여먹으라셨다. 효과는 굉장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매실 엑기스와 인산죽염을 먹으니 체기가 슬슬 가라앉고 식은땀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 조합 너무 맛있잖아? 급체한 와중에 맛을 느끼고 있는 걸 보니, 솔찬히 회복이 됐나보다. 급체는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어서 급체한 사람은 업어서도 안 되고, 약도 잘 들지 않고, 물도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던데 시부모님의 민간요법이 놀라웠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맞지는 않을 수 있으니, 참고만 하세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다음 날에도 가벼운 체증이 이어졌다. 한 번 급체하면 또 체할 수 있어서, 하루 정도는 금식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그렇게 했다. 그치만 저녁이 되자 입이 따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불현듯 머릿 속에 새빨간 액체가 떠올랐다.
‘캄파리!’
함께 사는 내 전속 바텐더 (남편 a.k.a. 이과장)에게 말했다.
“캄파리 소다, 한 잔 부탁해요. 위에 아버님이 주신 인산죽염 솔솔 뿌려서.”
이과장은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 아픈 사람이 무슨 술이에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반격했다.
“알만한 사람이 그래요? 캄파리도 처음엔 약이었잖아요. 내 몸이 원하는 건 내가 알아요. 레몬즙은 살짝만 뿌리고요?”
이과장이 구시렁대며 캄파리 소다를 만들어내었다. 한 모금 홀짝. 달고, 쓴 빨간 액체가 몸에 완전히 흡수되는 게 느껴진다. 뒤늦게 입안으로 딸려 들어온 인산죽염 알갱이가 짠 맛으로서 이 모든 맛을 더욱 더 쨍하게 만든다.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그렇게 한 모금 더, 한 모금 더. 후아. 모든 게 쑥 내려갔다.
캄파리와 같은 리큐르들은 처음엔 약용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한국에서도 술을 ‘약주’라 칭한 걸 보면 술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이거 약이야, 약!”이라고 했던 만국공통 전세계 술꾼들의 능청이자 너스레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진정한 술꾼들 사이에만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고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을지도 모른다.
‘4조, 1항. 일단 걸리면, 약이라고 우겨라’.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도, 약재로 만들어진 알코올에는 미스테리한 효능이 있기는 한 것 같다. 사실, 시어머님께서 주셨던 매실청도 실은 미세한 알코올이 있을게 틀림없다. 우리네 엄마들이 만드는 각종 ‘청’이나 ‘효소’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대부분 알코올이 함유되어있다. 당을 술로 만드는 효모가 살기 딱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K-엄마들은 당신들도 모르게 리큐르 마이스터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 아무튼 시어머님의 매실 리큐르와 캄파리로 급체를 극복한 사례가 있으니, 나도 한 동안은 이 핑계를 댈 수 있겠다.
“이거 약이야, 약!”
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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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양유미
가장 동시대적인 술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이쁜꽃의 디렉터.
그림 ⓒ양유미
‘아, 뭔가 잘못됐다.’ 시댁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알 수 없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식사하는 동안 처음 느껴보는 강도의 두통이 오더니 갑자기 토할 것 같기도 하고, 배탈이 난 것 같기도 했다. 진퇴양난. 일단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15분이 지나도록 어떤 해결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식은땀이 나더니, 땀으로 몸이 흠뻑 젖었다. 가랑비를 맞은 것처럼.
신이시여, 왜 하필 시댁에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시부모님께서 정성껏 차려주신 밥을 먹고 나서, 이렇게 되다니 혹여나 당신 탓을 하실까 걱정됐다. 일단 나가서 말씀드렸다.
“좀 급하게 먹었나봐요. 잠시만 더 화장실에 있어볼게요.”
5분 후 먹은 것을 전부 게워냈다. 즐거운 저녁식사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폐인이 되어 화장실에서 돌아온 며느리를 보고 시부모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에구, 미안해라. 너무 긴장하고 있었나보구나.”
시부모님들은 좋은 분들이시다. 나는 솔직하게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수 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전혀 반대에요. 너무 긴장하지 않고, 맛있어서 허겁지겁 먹다보니 그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전형적인 급체였다. 시어머님께서는 3년 묵은 껄쭉한 매실엑기스를, 시아버님께서는 인산죽염을 챙겨주셨다. 돌아가는 길에 매실 엑기스를 천천히 마시고, 인산죽염은 씹어먹지말고 입에서 녹여먹으라셨다. 효과는 굉장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매실 엑기스와 인산죽염을 먹으니 체기가 슬슬 가라앉고 식은땀이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 조합 너무 맛있잖아? 급체한 와중에 맛을 느끼고 있는 걸 보니, 솔찬히 회복이 됐나보다. 급체는 생각보다 위험할 수 있어서 급체한 사람은 업어서도 안 되고, 약도 잘 들지 않고, 물도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던데 시부모님의 민간요법이 놀라웠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맞지는 않을 수 있으니, 참고만 하세요.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다음 날에도 가벼운 체증이 이어졌다. 한 번 급체하면 또 체할 수 있어서, 하루 정도는 금식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그렇게 했다. 그치만 저녁이 되자 입이 따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불현듯 머릿 속에 새빨간 액체가 떠올랐다.
‘캄파리!’
함께 사는 내 전속 바텐더 (남편 a.k.a. 이과장)에게 말했다.
“캄파리 소다, 한 잔 부탁해요. 위에 아버님이 주신 인산죽염 솔솔 뿌려서.”
이과장은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 아픈 사람이 무슨 술이에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반격했다.
“알만한 사람이 그래요? 캄파리도 처음엔 약이었잖아요. 내 몸이 원하는 건 내가 알아요. 레몬즙은 살짝만 뿌리고요?”
이과장이 구시렁대며 캄파리 소다를 만들어내었다. 한 모금 홀짝. 달고, 쓴 빨간 액체가 몸에 완전히 흡수되는 게 느껴진다. 뒤늦게 입안으로 딸려 들어온 인산죽염 알갱이가 짠 맛으로서 이 모든 맛을 더욱 더 쨍하게 만든다.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그렇게 한 모금 더, 한 모금 더. 후아. 모든 게 쑥 내려갔다.
캄파리와 같은 리큐르들은 처음엔 약용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한국에서도 술을 ‘약주’라 칭한 걸 보면 술을 홀짝홀짝 마시면서 “이거 약이야, 약!”이라고 했던 만국공통 전세계 술꾼들의 능청이자 너스레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진정한 술꾼들 사이에만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고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을지도 모른다.
‘4조, 1항. 일단 걸리면, 약이라고 우겨라’.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도, 약재로 만들어진 알코올에는 미스테리한 효능이 있기는 한 것 같다. 사실, 시어머님께서 주셨던 매실청도 실은 미세한 알코올이 있을게 틀림없다. 우리네 엄마들이 만드는 각종 ‘청’이나 ‘효소’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대부분 알코올이 함유되어있다. 당을 술로 만드는 효모가 살기 딱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K-엄마들은 당신들도 모르게 리큐르 마이스터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 아무튼 시어머님의 매실 리큐르와 캄파리로 급체를 극복한 사례가 있으니, 나도 한 동안은 이 핑계를 댈 수 있겠다.
“이거 약이야, 약!”
nuruk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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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양유미
가장 동시대적인 술과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이쁜꽃의 디렉터.